연재
[전북 순창-⑦] 꽃 같던 청춘(靑春), 회문산 능선따라 흩뿌려지다
패잔(敗殘)의 기록, 빨치산 투쟁과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 정찬대 기자
  • 16.02.0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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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

 

조선대학교 정문 건너편(광주 동구 서석동)에서부터 전남대병원(광주 동구 학동)까지 길게 늘어선 광주 포로수용소(남광주 수용소)에는 빨치산 패잔병으로 넘쳐났다. 나무 널빤지와 천막을 올려 엉성하게 늘어뜨린 막사에는 김창근을 비롯해 수많은 포로들이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차가운 맨바닥을 고른 뒤 그 위에 짚을 깔고, 다시 모포 한 장을 얹은 것이 이들 잠자리의 전부였다.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는 물론 천막 곳곳에서 새나온 삭풍은 뼈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거제포로수용소에 이송돼 막사 배치를 기다라는 빨치산 포로들의 모습.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빨치산의 수감 생활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 가운데 하나다. 구타와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배고픔과 추위 역시 산속 생활에 뒤지지 않는다. 더욱이 삶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것은 이들을 특히나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온 것이 용할 정도로 많이 맞았다. 이동할 때는 동료들에 의해 부축을 받고 이동할 만큼 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늘 질질 끌려 다녔을 정도다. 잦은 구타와 고문으로 피똥을 싸기도 일쑤였다. 그렇게 맞아서인지, 아니면 어떤 스트레스 때문인지 몰라도 빨치산 활동에 대한 상당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듬성듬성 끊겨있다”

 

김창근은 포로수용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장기 구금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뼈와 가죽만 남았다. 조금이라도 씹을 것이 생기면 입안에 넣기 바빴고, 이 때문에 수용소에 난 잡풀은 물론 쥐까지도 잡아먹었다. 굶주림은 이처럼 사람을 이성 잃은 동물로 만들었다.

 

전주 사단본부와 남원의 군단본부를 거쳐 광주 포로수용소로 옮겨온 임방규도 수감번호 3125번을 배정받고 막사 한 곳에 수용됐다.

 

빨치산 포로들은 수용소 도착 첫날 발가벗겨진 채 머리에서 발끝까지 DDT(Dichloro Diphenyl Trichloroethane·유기염소 계열의 살충제이자 농약) 분말소독약을 뒤집어썼다. 훗날 ‘환경운동의 어머니’로 평가받는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L. Carson)은 1962년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DDT 사용에 대한 환경적인 해악과 신체에 끼치는 악영향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DDT는 박테리아나 유해 바이러스를 위한 최고의 살충제로 인식돼왔다. 사람 몸에 달라붙은 이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산에서 생활하던 빨치산의 경우 입던 옷을 장작불에 털면 쏟아져 나온 이들이 ‘투두둑’ 거리며 불꽃을 태울 정도로 많은 이가 기생했다.

 

온 몸을 하얀 살충제로 소독한 이후에는 ‘PW(Prisoner of War·전쟁포로)’라고 써진 군복을 입었다. 하지만 사이즈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소매가 7부가 됐고, 어떤 이는 허리가 커서 바지를 돌돌 말아 입었다. 앳된 얼굴의 소년 빨치산들은 몇 사이즈나 큰 헐렁한 군복 탓에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그럴 때면 포로들끼리 군복을 바꿔 입기도 했다.

 

포로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반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뼈만 남은 이들은 뻐쩍 될 새도 없이 죽어나갔고, 잠든 상태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 둘” “여기 셋” 이런 식이다. 몇몇이 들것에 실려 버려졌고, 하루 저녁에 30명 이상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은 이들에게 특히 무서운 존재였다. 임방규는 수용소 내 괴혈병을 이렇게 기억했다.

 

“일단 밥이 너무 적고 부실했다. 밥 한 덩이를 네 명이서 나눠먹었고, 소금에 절인 시래기나 곰팡이가 파랗게 피어있는 고등어구이를 찬으로 먹었다. 수용소 내에서 가장 많이 죽는 게 괴혈병이었는데, 비타민C가 부족하면 혈관이 터져서 온 몸이 푸릇푸릇해지고, 잇몸도 파랗게 염증이 생긴다. 거짓말 같은 얘긴데, 혀로 이빨을 누르면 치아가 45도 각도로 누울 정도로 흔들거렸다. 그리고는 몸이 붓고, 목이 부어 물도 안 넘어간다. 그러다 결국 맥도 못 추고 죽는 것이다”

 

온갖 장염도 이들을 괴롭혔다. 괄약근이 제 역할을 못해 변이 줄줄 새기도 했다. 특히, 잠자리에 변이 흘러 모포를 더럽히는 경우가 많아 장염이 심한 환자는 막사 입구 쪽에서 재웠다. 변을 보면 창자가 녹아내려 질게 빠졌고, 혈뇨와 혈변을 누는 것도 일상이었다.

 

서무과에 있던 임방규의 한 동무는 “모두 1600여명이 사망했다”고 귀띔해줬다. 병단에서 함께 활동한 그는 서무과에 배치돼 수용소 내 행정 정보를 도맡았다. 결과적으로 4천~5천여 명이 수감된 이곳에서 30~40% 가량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목숨을 잃은 셈이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전북 순창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임방규씨와 김창근씨, 그리고 순창과 임실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기사화됐습니다. 결코 꺼내놓기 쉽지 않았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날의 청춘과 희생을 술회해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전북 순창 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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