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여야 잠룡과 개헌론의 함수관계
[‘87년 체제’ 30년] 또 다시 개헌…현실은 ‘동상이몽’
  • 정찬대 기자
  • 16.06.0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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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 30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오롯이 담겼으나 이제는 구체제가 돼 버린 낡은 옷. 어정쩡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었고, 의회 견제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역사적 진보는 오랜 세월 고이면서 퇴행했고, 권력의 구조적 비대함은 시민의 자유를 위축시켰다. 대선을 앞둔 각 주자들은 개헌 카드를 꺼내들며 반전을 꾀하는데 여념 없고,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입단속 했던 현 권력 역시 임기 말 레임덕을 막기 위한 도구로 이를 적극 활용한다. 총대는 메지 않되 군불만 때던 개헌 활용의 악순환은 그간 매번 반복되던 현상이다. 과연 차기 대선은 어떨까? <편집자 주>

 

 

지난해 말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에서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를 골자로 한 분권형 개헌론이 제기된 바 있다. 친박 핵심 홍문종 의원은 “외치(外治)를 하는 대통령과 내치(內治)를 하는 총리, 이렇게 하는 것이 현행 5년 단임제 대통령제보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이원집정부제를 직접 언급했다.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 조합’에 대해서도 “옳고 그름을 떠나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밝혔다.

 

친박 좌장 최경환 의원도 “5년 단임제 정부에서는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이를 거들었다. 하지만 당내 개헌 움직임은 박근혜 대통령의 ‘시기상조’ 발언에 쏙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앞서 2012년 11월6일 새누리당 대선후보 시절 4년 중임제를 골자로 한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시 박 후보는 ‘정치쇄신안’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선거용의 정략적 접근이나 내용과 결론을 미리 정해놓은 시한부 추진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집권 후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공감대를 확보해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공언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야권 후보단일화를 위한 첫 회동을 앞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야권 단일화 움직임에 대한 돌파구를 개헌을 통해 얻고자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당-청 개헌카드…“시기만 보고 있다”

 

지난달 25일 일 년여 만에 방한한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시하면서 그간 정치권에 회자돼 온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반 총장이 사실상 ‘친박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친박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친박계 한 의원은 본지와 통화에서 “경쟁력 있는 분을 모신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대선후보로서의 역량은 충족돼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만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 구도에 대해 “우리(친박) 입으로 총리를 하겠다, 무슨 실무권력을 장악하겠다고 얘기한 적은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여러 논의 끝에 적절하게 개헌이 추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친박 내부에서 개헌 논의를 활발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헌을 금지어로까지 제시한 박 대통령 입장과는 별개의 움직임이란 것이 내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개헌은 정권 말 권력기반을 다지고 정국 주도권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을 막기 위한 유효적절한 카드로 지목된다. 개헌을 통해 친박계가 다목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절대 반지인 셈이다. 현 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가, 집권여당(특히 친박)에 대한 비판이 개헌이란 블랙홀 속에 모두 다 빠져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개헌 카드를 꺼내든 목적성은 충분하다.

 

이를 반영하듯 친박계 핵심 의원은 3일 <커버리지>와 통화에서 “당-청이 개헌에 대해 조심스럽게 얘기 중”이라며 “언제 꺼낼 것인가, 타임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친박 내 물밑에서도 개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87년 체제가 벌써 30년이 지났고, 서른 살이 된 만큼 현 시대상을 반영한 개헌이 필요하다”며 “4년 중임제, 이원집정부제, 내각책임제 등을 놓고 논의 중”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각계에서 머리를 맞대 토론하고 국민 총의를 모은 다음 차기 정권이 이를 실천해야 한다”며 “우리(친박)도 지금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박 측에서 주장하고 있는 개헌은 다수 의석 정당이 행정부 구성권을 갖는 의원내각제 또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중간격인 이원집정부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기에 4년 중임제도 포함돼 있다. 야권에선 ‘장기집권 플랜’이라며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20대 총선에서 16년 만에 여소야대가 이뤄졌지만 기본적으로 현 선거구도는 보수정당에게 유리하도록 되어있다. 전체 지역구 253석 가운데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수도권(서울49·경기60·인천13석)을 제외하면 영남 분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실제 야권의 텃밭인 호남의 전체 의석수가 28석(광주8·전남10·전북10석)인데 반해, 새누리당 안방인 영남은 65석(부산18·대구12·울산6·경남16·경북13석)을 차지하고 있다. 정의당 대표를 지낸 유시민 전 의원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친박계 한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에서 “어차피 개헌에 대한 필요성은 모두가 공감하는 것 아니냐”며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다. 당리당략적으로 접근하고 그런 쪽으로만 해석하려든다면 어떻게 개헌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날을 세웠다.

 

D-day 1년6개월…불 지핀 ‘개헌론’

 

개헌을 둘러싼 야권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개헌론을 꺼내든데 대해 여야 모두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개헌 관련 이슈를 선점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솔직한 속내다. 그런 점에서 20대 국회 개원 첫날 열린 ‘개헌 포럼’은 여러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특위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87년 체제가 30년이 다 돼간다.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원래 취지에 맞게 소기의 성과를 거뒀는지 짚어볼 시기가 됐다”며 개헌에 찬성했고, 국민의당 천정배 공동대표는 현 선거구제 개편을 전제로 내각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의회제(의원내각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개헌을 실천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다만 이들은 논의는 필요하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실현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선을 앞둔 각 주자들의 개헌 목소리도 곳곳에서 제기된다. 대선이 1년 6개월여 남았지만 반기문 총장의 조기 등판과 손학규 전 의원의 정계복귀 등 정치 지형이 급변하면서 이슈선점의 극대화를 노리겠다는 포석이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개헌을 통한 후보 간 합종연횡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19대 국회를 이끈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달 26일 싱크탱크 ‘새한국의 비전’ 창립기념식에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 (현 체제는) 권력집중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개헌론에 불을 지폈다.

 

그는 “개헌을 통해 권한을 분산하고 합의제 민주주의를 꽃피워 불안정성과 흠결을 보완해야 한다”며 “차기 대통령은 취임 1년 내에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간의 대선 후보들이 개헌을 공언하면서도 정권 출범 후 이를 추진하지 않은 점을 꼬집은 것이다. 현재 정 전 의장은 새로운 정치결사체를 모색하며 차기 정권 창출을 노리고 있다.

 

‘새판짜기’를 제시하며 정계복귀를 시사한 손학규 전 상임고문도 개헌론을 끄집어냈다. 손 전 고문은 지난달 19일 일본 게이오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한국 정치는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로 갈지, 다당 연립제로 갈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라며 “내년 대선주자들이 개헌에 대한 각자의 안을 공약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원집정부제에 대해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외교·안보(외치)와 내치가 제대로 분리되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그런 점에서 이원집정부제가 가능한 솔루션(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후보 간 ‘합종연횡’…명분은 ‘개헌’

 

신율 명지대 교수는 <커버리지>와 통화에서 개헌을 둘러싼 현 정치권 상황에 대해 “유력 대권주자가 없는 만큼 후발주자들이 계속해서 개헌을 언급할 가능성이 높다”며 “앞으로도 약체 후보를 중심으로 개헌 목소리가 활발히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 교수는 특히 이 과정에서 “후보 간 연대 가능성이 있다”며 “개헌이 그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한 라디오인터뷰에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원희룡 제주지사도 “정치권끼리 서로 연대하는 데 있어 명분은 개헌이 될 것”이라며 “내년 대선 공약으로 개헌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실제 정치권 안팎에선 정 전 의장과 손 전 고문, 그리고 안철수 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의 연대 가능성이 흘러나오고 있다. 정 전 의장의 ‘새한국의 비전’이 개헌의 핵심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도는 가운데 발기인 명단에 더민주 진영 의원과 우윤근 전 의원, 국민의당 김동철 의원의 이름이 올라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 소속인 진 의원은 과거 새누리당에 있을 때도 개헌과 관련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또 야권의 대표적 개헌론자로 손꼽히는 우윤근 전 의원 역시 지난 19대 국회 후반기 원내대표 시절 국회 내 개헌특위 구성을 제안했을 만큼 개헌에 적극적인 인물이다. 여기에 김동철 의원은 손학규계 핵심 인사로 분류된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손 전 고문과 정 전 의장이 연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으며, 신율 교수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윤 센터장은 특히 “독보적인 주자가 없는 상태에서 입지를 다지고 판을 바꾸기 위해서도 개헌에 대한 목소리나 기류는 높아질 것”이라며 “개헌을 통한 후발주자들의 합종연횡 움직임도 앞으로 더욱 구체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그러나 개헌에 대한 구체성과 관련해 “4년 중임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어느 정도 형성됐지만, 이원집정부제나 의원내각제 등 권력구도 개편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다”며 “이에 대한 공감대를 이끄는 문제와 선거를 앞두고 개헌을 끄집어내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소하는 것이 각 후보들의 가장 큰 숙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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