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생활
[답사] 느림 속으로 떠나는 봄여행, 청산도
 
  • 이강
  • 16.08.2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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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코드로 떠나는 청산도로의 힐링여행이다. 따스한 햇살 한 줌, 맑은 바람 한 자락에 정신이 퍼뜩 깨어나는 하나의 공간이다. 섬 청산도는 심신을 치유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혜민 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에서 삶의 지혜를 여는 길을 보여주었듯, 잠시 삶이라는 공간, 뭍에서 벗어남으로 비로소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치열한 일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느긋하게 머무르며 심신의 위로와 휴식을 취하고, 좋은 봄기운을 받기에 제격인 곳이 바로 섬 청산도다. 봄이 완연한 이즈음 유채꽃 만발하고 청보리 일렁이는 섬, 청산(靑山)으로 떠나보자.
 
봄이 오는 청산도 전경. 사진/이강
 
청보리가 일렁이고 유채꽃 사이로 우리 가락이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청산도의 봄. 어쩌면 ‘느림의 길’에서 우리가 마주하거나 찾고자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느림을 통해 삶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 청산도의 봄은 도무지 흠잡을 것이 없다. 일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놓아두고 때 묻지 않은 푸른 섬과 바다와 길을 따라 걸으면 그것으로 이미 마음은 맑아진다. 그것이면 또 충분하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청산도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내내 그리워하던 그 섬을 찾아간다. 섬 청산도는 하나의 또 다른 공간이다. 섬은 뭍이라는 공간과 과감히 결별하여 있는 탈일상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뭍에 사는 이들은 늘 섬을 그리워하고, 섬에 사는 이들 역시 어김없이 뭍을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섬은 더더욱 그리운 곳, 아름다운 곳으로 각인된다. 섬은 탈속적인 공간의 힘을 지니고 있다.
 
하루에 일곱 차례 운행되는 청산도행 배를 타기 위해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 시간을 가늠한다. 터미널에서 배를 기다리는 이들은 완연한 청산도의 봄을 보기 위해 줄지어 기다린다. 섬에 들어가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본래 섬사람이거나, 본래 뭍사람이다. 섬사람은 도시에서 꼭 필요한 물품을 가득 담은 짐꾸러미를 들고 있고, 뭍사람은 기다리는 내내 항구 저편의 섬을 그리워하는 표정이다. 섬으로 들기 위해선 익숙하지는 않지만 섬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승선신고를 하며 이름자와 주민등록번호 등 육지에서 밴 흔적이나 습관을 모두 남겨두고 배에 오른다. 어차피 섬이란 공간 안에서의 불려지는 호칭이야, ‘어이, 아저씨’거나, ‘여보 이 사람아’ 정도면 충분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그저 놓아두고 배에 오르는 것이 섬을 찾아가는 요령이자 규칙이기도 하다.
 
“어이 여보게들, 섬에 가시오? 그 섬이 참말로 좋아라.” 그뿐이다.
 
그 푸르른 섬. 청산도의 공기는 뭍의 공기와는 청량함이 사뭇 다르고, 또한 거침없이 내어 달리는 도시의 직선도로와는 그 길굽이가 다르며, 빌딩 숲에 가려진 도시의 공간과는 또 다른 품을 지니고 있다. 그 섬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조금은 느리거나, 조금 더 넉넉하거나 여유롭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청산도의 봄. 사진/이강
 
남해의 쪽빛바다를 그리워하던 여행객들은 둥둥 떠 있는 섬으로 떠난다는 기대만으로도 한껏 부푼 얼굴이다. 섬으로 가는 설렘. 출발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뱃고동소리처럼 여행객들의 가슴이 동동 거린다. 남해 다도해의 가장 끝자리쯤에 자리한 청산도는 전남 완도(莞島)에서 남쪽으로 19.2㎞ 떨어져 있는 섬이다. 다도해에서도 그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한데, 일찍이 하늘, 바다, 산 모두가 푸르다 해서 바다에 떠 있는 푸른 산의 의미로 ‘청산(靑山)’이라 불리워졌다. 또 예부터 신선이 산다고 해서 신선 선(仙)자를 붙여 선산(仙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청산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생 가보고 싶어하는 여행지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진 섬은 있는 그대로의 풍광으로 한국의 원형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이는 청산도가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city)’로 인정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느림의 코드와 힐링의 코드를 바탕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슬로시티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슬로시티’는 생산성과 속도만을 강조하는 빠른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환경,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사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여객들을 가득 실은 배가 긴 뱃고동을 울리며 앞바다의 섬, 청산도로 출발한다.
 
느림의 섬, 청산 100리길에 봄이 한창
 
청산도는 빠름의 코드를 잃어버린 느릿느릿한 삶의 풍경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때문에 느림의 삶이 몸에 배인 이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구나 속도를 잃어버리고 만다. 최저 속도가 ‘시속 몇 키로냐?’고 묻는 도시인의 주절거림은 그저 허튼 소리일 뿐이다. 도청항 부두에 내려 청산도 슬로 길 백리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섬이 지니고 있는 느릿한 태도다. 섬에 첫 걸음을 내딛은 사람들은 속도를 잊어버린 또 하나의 공간이 생경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내 뭍사람들 역시 잠시나마 할 일 없는 ‘본래 섬사람’처럼 느릿한 품세로 길을 따른다. 천천히 굽이진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래 놓아두었던 바른 걸음걸이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섬마을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풍경.
 
청산도 슬로길은 총연장 42.195㎞의 도보길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에 안성맞춤인 길이다. 해안선을 에둘러 이어진 전체 11구간으로, 미항길, 사랑길, 고인돌길, 낭길, 범바위길, 용길, 구들장길, 다랭이길, 돌담길, 들국화길, 해맞이길, 단풍길, 노을길, 미로길 등으로 청산도를 한 바퀴 도는 길이다. 하지만 사실 ‘슬로’라는 길의 이정표들이 가리키는 곳은 다소 관념적이기까지 하다. 이정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어느 산꼭대기의 정상이거나, 파도가 일렁이는 해안선의 끝자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마주할 수 있는 관조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 섬 구석구석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오래 전 잊고 지냈던 옛 마을의 풍경으로 발길을 이끌기도 하고, 어느 바닷가 어부의 낡은 고기잡이터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봄이면 유채가 흐드러지는 언덕길을 서붓서붓 오르고, 어느 중년의 부부는 서편제의 아리랑이 울려퍼질 것만 같은 청보리밭 언덕 마을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어 선다. 그리고 길을 걷는 동안 아주 오래된 옛 섬마을의 풍경 속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섬 구석구석에 원형적인 한국의 심상이 배인 풍경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청산도에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것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이곳에서 촬영되면서 부터다. 임 감독은 가장 한국적인 풍경의 원형을 찾아다니다 청산도 당리에서 그만 마음을 놓아버렸다. 촬영지였던 당리 언덕길의 S자 굽이길과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 세트장의 모습에는 세월이 그대로 묻어있다. 청산도에는 예전 풍습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옛 방식으로 물고기 잡는 독살도 그대로 남아있고, 앞바다를 바라보며 일궈놓은 구들장 논도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으로 펼쳐진다. 또 아직도 섬 고유의 독특한 장례의식인 초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상서리 마을 돌담장, 이야기가 서려있는 범바위 등의 풍경도 남도 섬마을 풍치가 그대로다. 기웃기웃 자연의 시간 안에서 봄에 물든 섬풍경에 눈길을 두면 이내 마음이 푸근하다. 느리게 흐르는 자연의 시간과 탈일상적인 섬의 공간 안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질 것이다.

 

원문: 뉴스토마토

 

이강 여행작가 /뉴스토마토 여행문화전문위원

ghang@han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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