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생활
[답사] 꽃바람 부는 봄날, 일산 5일장에 가다
 
  • 이강
  • 16.08.2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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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저만치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때에는 한심하다. 계절이 바뀌는 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바쁘게 사는 때에는 슬프다. 저만치 봄꽃이 피어나는데 발 아래 작은 쑥밭도 보지 못하고 하늘 꿈만 쫓고 사는 것은 부끄럽다. 겨우내 두부 빚어 길목에 앉아있던 어메의 소쿠리에 새 봄 담긴 것도 모르고 사는 것은 영 매정하다. 봄아, 너 오는 길목에서 그리운 것은 꽃보다 어여쁜 장어미들이다. 꽃보다 먼저 장어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때가 봄이다. 겨우내 늘어버린 주름진 어미의 얼굴들이 장골목 길모퉁이에서 꽃처럼 웃는다. 봄날, 꽃보다 먼저 피어나는 게 장어미들의 꽃웃음이다.
 
일산 5일장 풍경. 사진/이강
 
서울역을 기점으로 경의선을 타고 일산역에서 내리면 성남 모란장에 뒤지지 않는 경기도 최대 5일장 ‘일산장’이 열린다. 일산 5일장은 100년 전통의 5일장이지만, 이제는 도시 외곽에 비껴 앉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산장은 평상시에도 일반상가를 중심으로 장이 서다가, 끝자리가 3, 8로 끝나는 날에는 5일장이 열린다. 봄볕드는 장골목에 비껴앉은 장어미들은 일산장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5일장 중 하나라고 믿는다.
 
도시의 바깥장, 일산장으로의 봄마실
 
꽃 피는 산골은 마다하고 그리 멀지 않은 장골목을 찾아가는 것이 봄맞이의 습관이 되었다. “봄이 일어서니 /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라 적은 이해인 수녀의 <봄 일기> 구절을 읽다가 꽃처럼 피어날 장어미들이 그리워 경의선 전철에 올라탄다. 경의선 철로와 일산장은 무관하지 않다. 본래 일산장은 지금의 고양시 대화동 일대에 서던 사포장이 그 모태이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에 일제에 의해 경의선이 개설되면서 지금의 일산역 부근인 일산사거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경의중앙선과 연결된 경의선은 1906년부터 서울과 신의주를 오가던 길이 518.5킬로미터의 복선철도다. 일제는 경의선을 한반도의 지배와 만주로의 확장, 대륙침략을 위한 활로로 경의선을 건설했었다. 한때는 약 700여 킬로미터로 그 노선이 연장되어 시베리아 대륙철도의 꿈을 꾸기도 했었다. 1906년 당시 경의선은 용산과 신의주 사이의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면서는 경부선과 연결되어 한반도의 동남에서 서북으로 관통하며 운수 교통량이 전국 최대에 달했던 철도였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경의선은 38선 이남의 서울에서 개성 사이의 74.8킬로미터를 단축 운행되고, 1951년 한국전쟁 중에 이르러 중단되고 만다. 이후 분단의 시대를 지나며 더 이상 북으로는 달리지 못하고, 현재는 서울역을 기점으로 문산역까지 운행되고 있다. 요사이 문산역에서 도라산역까지의 전철화 사업이 예정되고 있다.
 
구 일산역. 사진/이강
 
일산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역사를 빠져나오니 구·일산역 앞의 작은 광장에서부터 장터 분위기가 왁자지껄하다. 벌써 장꾼들이 흥을 살린 뿡짝뿡짝 장단, 봉다리를 뒤춤에 든 노인들의 봄마실이 신명으로 들썩이기 시작한다. 역에서 출구로 내려서면 현재의 일산역 왼편으로 구 일산역이 자리하고 있다. 구 일산역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준공되어 현재는 근대문화유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2009년 현재의 일산역이 문을 연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역사를 보수하여 ‘고양 일산역 전시관 및 신세계 희망장난감 도서관’으로 탈바꿈하였다. 역전시관 안을 살펴보니 경의선과 일산역의 옛 역사와 자료, 일산 5일장 등을 테마로 한 사진과 동영상, 철도관련 물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외부에는 갤러리, 아트트릭을 활용한 포토존 등이 마련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쉼터 겸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잠시 옛 시절의 모습을 둘러보고 5일장 골목을 찾아간다.
 
꽃보다 먼저 피는 것이 장어미의 웃음이다
 
일산역에서 바로 골목을 따라 걸으면 50여 미터를 걸으면 일산장이 나타난다. 장어미들의 말대로 한때 일산장은 파주, 고양 인근에서 가장 큰 장으로 손꼽혔다. 장이 서면서 주변의 농지까지 매립해 시장을 확장하기도 했고, 경기권에서는 꽤 큰 우시장까지 들어서 있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 일산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는 온통 들밭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신도시답게 아파트가 장을 빙둘러 감싸고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아직도 상시 열리는 일산시장 본장을 중심으로 5일 장터가 꾸려지면서 장의 규모는 상당하다. 또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지만 골목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도 옛 시골의 정취가 남아있는 것도 일산장의 매력이다.
 
일산장은 5일장이 서는 날이면 큰길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좌판들이 이어진다. 각종 농산물을 비롯해 제철 식거리들이 노점으로 깔리고 다양한 이색 구경거리들이 구색을 갖추어 장을 꾸린다. 본통 골목은 터주대감들이 외곽으로는 경기도권을 도는 장돌뱅이와 장어미들이 바깥장을 꾸려낸다. 본장을 따라 이어진 골목을 따라 걸으니 먹거리와 맛집 등이 장터의 분위기를 한창 북돋는다. 장판마다 생선가게, 과일가게에서 오가는 손님을 붙들어 세우고 이력이 붙은 흥정 솜씨를 펼치는 것이 흥겹다.
 
일산장 장터. 사진/이강
 
봄날의 5일장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가게는 역시 봄꽃을 내어놓은 꽃장과 씨앗을 파는 종자가게, 농사철을 맞아 농기구를 파는 가게들이다. 농사철을 맞은 농부들과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봄꽃에 취해있는 풍경이다. 장터 한 켠에서 삼십년 가까이 민속품을 팔며 전국의 장터를 찾아다닌다는 한 상인은 수도권 인근의 고양 일산장, 성남 모란장, 파주 전곡장 등의 장을 돌다가 봄꽃이 피어나는 3월부터는 1톤 트럭에 민속품을 싣고 전라도 곡성장, 하동 화계장 등 전국의 장터까지 돌며 꽃구경도 한다고 자랑한다.
 
“겨울 가면 봄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하는 것이 인생 아닌가? 그 맛에 사는 것이지. 돌고 도는 인생, 세상살이가 다 그런거란 말이지요. 금새 겨울인 듯하지만, 다시 꽃이 피고, 꽆이 지나나면 다시 잎이 피고 하듯이. 봄에 장날에 오면 삶의 활기를 찾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장에 나서면 사람 사는 세상인 듯하니 참 좋은 것이지요.” 상인은 요사이 사는 게 팍팍하여 장터에 장돌뱅이, 장꾼, 장돌림 등으로 불리는 길 위의 장사치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귀띔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생계를 짊어진 가장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찾으러 장터에 나온다고 덧붙인다.
 
봄날, 꽃보다 먼저 피는 것이 장꾼들의 희망이다. 즉석에서 기름을 뽑아내는 기름방 어머니, 5일장의 터주대감인 뻥튀기 장사는 장터의 명당 길목을 차지하고 함박 웃는다. 길 한 켠에 비껴 앉은 장어미들은 소쿠리마다 봄을 가득 채워놓고 봄볕의 온기를 더한다. 엿장수의 가위 장단과 장돌뱅이들의 고함소리가 5일장의 봄바람을 부른다. 고단했던 겨울의 무채색 풍경에도 다시 봄꽃이 피어나듯, 알록달록한 꽃바지 입은 장어미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활짝 피어난다. 꽃바람이 불어 사람들의 발걸음에 늘어나니 싱글벙글 욕심이 없는 심사다. 봄이 오는 때에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의 의미를 넘어선다. 봄바람 살랑 부는 장날, 꽃보다 먼저 피는 것이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다.

 

원문: 뉴스토마토

 

이강 여행작가 /뉴스토마토 여행문화전문위원

ghang@han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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