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생활
“네 열일곱살은 내 열일곱살이었다”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후방의 전쟁
  • 박성현
  • 16.08.29 15:54
  • facebook twitter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
  • 글자크기
  • 글자크게
  • 글자작게
  • |
  • print
  • |
  • list
  • |
  • copy
한국전쟁 66주년을 기념해 기획전시 ‘6·25전쟁, 미 NARA 수집문서로 보다’가 6월21일부터 7월29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다. 미국 국가기록원(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 수집·소장한 문서들 중에는 몇몇 흥미로운 내용들이 눈에 띄는데,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 윌러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이 북한군의 6월 경 남침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1950년 3월10일 상부에 보고했다는 미 국무부 기록이나, 1950년 11월 초 압록강 철교 폭파 문제를 놓고 대립한 맥아더와 트루먼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학살과 보복의 연쇄 고리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라는 책이 있다(박찬승 지음, 돌베개, 2010년).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이 책은 마을에서 일어난 갈등과 상호 학살의 분석을 통해 한국전쟁에 미시사적으로 접근한 연구서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 차원의 학살이 계급·이념의 갈등에서 연유했다기보다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 신분 간 갈등, 종교적 갈등 등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만인보>의 시들에도 이러한 상황이 일면 드러나 있다. 좌·우익의 보복극은 종종 묵은 원한을 푸는 기회가 되기도 했는데 다음의 시가 그러하다.
 
“군 종자소 타왔으나 / 소여물 썰 작두가 없다 / 진규 아비 작심 / 작두를 훔쳐왔다 / 여물 썰어 / 소에게 쇠죽 쑤어주고 기뻤다 // 다음날 / 작두 주인 김옥철이 와서 / 작두를 찾아갔다 // 한 동네에 / 도둑을 두고 살다니 / 퉤 퉤 / 침 뱉고 갔다 // 동네에서 진규 아비 늘 눈총 받고 손가락질 받았다 // 인공시대가 왔다 / 그동안 기죽었던 진규 아비 / 내 세상이다 하고 / 떨쳐일어났다 // 몇해 전 / 이승만 박사 지지대회에 동원되어 / 동네사람들과 함께 참석한 일로 / 작두 주인 김옥철을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반동분자로 고발했다 / 내무분서에 / 두 손 묶여 잡혀갔다 // …”(‘모함’, 19권).
 
학살은 또 다른 학살을,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머니 / 누이동생 / 두 동생이 / 떠나는 인민위원장에게 붙잡혀 죽었다 // 도망쳐 살아난 김종호 / 도망간 인민위원장 딸 잡아다가 / 빈집에 끌고 가 / 강간한 뒤 죽였다 // 또다른 빨갱이 여편네 잡아다가 / 강간한 뒤 죽였다 / 세 번인가 / 네 번인가 / 다섯 번인가 / 그렇게 죽이고 나서 // 보름달 뜬 밤 / 산꼭대기에 올라가 울부짖었다 / …”(‘김종호’, 18권). 
 
‘6 ·25 전쟁, 미 NARA 수집문서로보다’ 전시회가 열린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전시실에서 관람객이 전시된 미국 국가기록원(NARA)에서 수집한 6 ·25 전쟁 관련 비밀해제 문서와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용둔마을 이야기 
 
전세의 변화에 따라 좌·우익의 지배 판도가 바뀌고 보복 학살이 극렬했던 마을들 중에는 고은 시인의 고향마을인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도 포함되었다. “우리 동네 용둔마을 꼭꼭 숨은 두메마을 / 하늘에서나 보아야 보이는 마을 / 이런 마을에 / 큰 재앙이 두 번 // 한 번은 증조할아버지 때 / 갑오년 난리로 / 이 마을 장정들 / 전주감영까지 잡혀가 죽었던 일 / … // 한 번은 아버지 때 / 6·25 난리로 / 우익 경찰이 보도연맹 잡아다 죽였던 일 / 좌익이 우익을 잡아죽였던 일 / 9·28 수복 직후 / 우익이 좌익을 잡아죽였던 일 / 어린 내 몸에서 / 송장 파내고 / 송장냄새 열흘 가도 보름 가도 / 아무리 빨랫비누로 씻어내도 씻어내도 / 지워지지 않던 일 / 미제 뒷산 / 우리 동네 할미산 / 아이 밴 아낙네 송장 / 허파 튀어나온 송장 무슨무슨 송장들 // 수리눈에 / 저 아래 코딱지만하게 내려다보이는 동네가 / 어찌 이같은 큰 재앙 내림인지 / …”(‘달밤’, 2권).
 
고은 시인의 자서전에도 나오는 이 실화의 내용은 당시 10대였던 소년 은태(고은 시인의 본명)의 정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어서, 이후 시인이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하게 된 계기가 된다. 1949년에 창설된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사상범을 전향시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보호·인도한다는 취지하에 국가가 대국민 사상통제를 실시한 것인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와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전국적으로 학살한다. 이는 인공 치하가 되면서 우익에 대한 보복 학살을 불러오게 되고 인공 말기 후퇴하던 인민군은 유엔군의 지주(支柱)가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는 명령에 따라 다시 학살을 감행한다. 1950년 9·28 수복 후 인민군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다시 우익의 보복 학살이 진행된다. 
 
정답던 마을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친지, 친구가 죽어가는 상황을 직접 보아야 했던 소년 은태는, 자서전에 의하면, 9월30일부터 10월 3, 4일까지 여기저기에 묻힌 학살당한 시체들을 파내어 정돈하고 가족들에게 인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사실, 고은 시인의 방계가족만 보아도 좌·우가 섞여 상황에 따라 번갈아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외삼촌은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고 당숙은 마을 인민위원장이었으며 농부인 아버지는 마을의 반장을 했다는 이유로 인공 시절 잡혀가는 처지였다. 인민군 퇴각 당시 학살대상자가 되지 않도록 고은 시인의 아버지를 도왔던 좌익 당숙 고판섭은 행방이 묘연해졌으나 그의 가족, 즉 시인의 당숙모인 수레기댁과 육촌 누나 복순, 누이 옥순은 할미산으로 끌려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방공호, 무기고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한 굴에서 총살당하고 만다. 
 
봉태와 은태
 
할미산의 일본군 진지인 굴로 끌려가 살해당한 40명가량의 사람들 중에는 은태 소년의 오랜 동무인 봉태도 있다. 유엔군 소속의 한국 병사, 흑인 병사 둘이 앞뒤에 배치되고 치안대가 이끄는 포승줄 행렬을 따라가던 고은 시인의 기억은 이러하다. “치안대장의 명령과 함께 이 긴 행렬은 유난히 자갈이 많은 할미산 밑 동고티 길을 올라갔다. 누군가가 걸음을 늦추다가 치안대원의 몽둥이를 맞기도 했다. 그들과 그들을 끌고 가는 자들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복순이 누나 옆으로 가서 ”누나!“ 하고 가만히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 인사에 실패한 것이다. 마치 찰떡 한 덩어리를 씹지 않고 억지로 삼킨 것처럼 내 가슴이 막혔다. 그때 나는 발을 헛디디어서 고꾸라졌다. < … > 내 오랜 친구였던 봉태 쪽으로 내가 뒤처졌을 때 늘 마음씨 넉넉하던 그가 나에게 힘없이, 그러나 아주 간절하게 말했다. “은태야, 나 살려다오!” 이 말에 내 가슴의 답답함이 펑 뚫렸다. 내 입에서 어떤 대답도 나올 수 없었다. 그것은 이 막판에서 내가 아무런 권력이 없는 것을 뜻한다. 김봉태, 나에게 책을 자주 빌려 주었고 먹을 것도 잘 주었던 친구. < … > 이목구비가 잘 갖춰진 아름다운 소년인 그는 마음씨가 좋아서 돈 없는 아이에게 돈을 주기도 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그의 커다란 두 눈을 보자 내 눈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복숭아뼈께가 더 쑤셔댔다. 나는 자꾸 뒤로 처졌다.”(<고은 전집> 23권, <폐허의 영혼>, 김영사, 2002년, 458쪽)
 
이러한 배경을 알게 되었을 때 시 ‘봉태’를 읽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 아려 오게 된다. “나하고 국민학교 일이등 다투었지 / 부잣집 아들이라 / 옷이 좋았지 / … / 도시락에 삶은 달걀 환하게 들어 있었지 / 흰 쌀밥에 보리 뿌려졌지 / 그러나 누구한테 손톱발톱만치도 뽐낸 적 없지 / 너희 논 옆에 우리 논 하나 있다 / 너하고 나도 / 의좋게 지내자고 굳은 떡 주며 말했지 / 그런 봉태 / 수복 직후 아버지 죽은 뒤 / 동네사람에게 끌려가 / 할미산 굴 속에서 죽었지 / 유엔군 흑인 총맞아 죽었지 / 그 달밤에 / 그 캄캄한 굴 속에서 죽었지 / 봉태야 / 나는 너 하나 살려 낼 수 없었다 / 네 열일곱살은 내 열일곱살이었다”(‘봉태’, 2권). 마을에서 존경받던, 이사장 출신의 너그러운 사람 “유태 봉태 아버지” 김병천은 “일본책 루쏘 에밀(을) 읽은” 온건한 사회주의자였고 “그 어른 배다른 삼형제 다 사상가 되었다가 / 6·25 9·28 직후 / 동네 치안대에 잡혀와서 갇혔는데 / 동네사람한테 늘 존대받고 살아오다가 / 청풍 김씨 헛간에 갇혔는데 / 그 치욕에 못 견디어 / 두 팔 등뒤로 묶인 채 뛰쳐나와 / 화톳불 활활 타는 밤중 / 그만 아홉 길 우물에 몸 던져 버렸다”(‘김병천’, 3권).
 
후방의 전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군, 남측 군·경과 치안대, 북측 인민군과 좌·우익 민간인들에 의한 것이나, 이념과 상관없이 원한과 복수심에 의한 보복 학살도 광기 어리게 진행되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물론 남북 국가권력의 개입이 있다. 오늘 6·25전쟁 전시회장에는 전시된 자료들을 보며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회를 밝히는 어르신도 보이고,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기록들을 살펴보는 젊은이들도 보인다.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고은 시인과 역사로 배우는 독자들이 <만인보>의 ‘한국전쟁’ 시들 속에서 만나듯이.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원문: 뉴스토마토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