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생활
“세상은 얼어붙었습니다”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함평 그리고 거창 민간인 학살
  • 박성현
  • 16.08.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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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권10 위서10 순욱전(荀彧傳)에 의하면, 조조가 복양에 진을 친 여포와 싸우던 중 서주 자사(刺史) 도겸이 죽었다는 소식에 서주를 먼저 치러가려 하자 조조의 참모인 순욱이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동쪽은 모두 보리를 거두어 성벽을 견고히 하고 들을 비워(堅壁淸野) 장군을 기다리고 있으니 장군이 공격해도 서주를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른바 ‘견벽청야’,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두 거둬들여 적의 식량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이 1950년 12월 함평과 1951년 2월 거창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제11사단의 작전이었던 바, 이 군대는 곡식 대신 사람들을 거두었다. 
 

‘초토화’로 쓰인 ‘견벽청야’
 
한국전쟁 시기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빨치산들의 소탕작전이 곳곳에서 펼쳐졌는데, 1950년 12월 2일 전남 함평에서 소탕작전을 벌이던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사병 두 명이 빨치산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5중대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 12월6일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에서 시작된 학살극은 1951년 1월14일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린아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524명을 죽이고 가옥 1천454동을 불태웠다(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p. 165). 이 초토화 작전에 대한 한 증언이 다음의 시에 담겨 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 11사단은 토벌사단이었다 / … // 1950년 12월 7일 / 월야면 내동 송계 동산 등 / 일곱 마을 덮쳤다 // 집집마다 불질렀다 / 7백여명이 모였다 / 2백명을 골라 / 기관총 3정 / M1소총이 불을 뿜었다 // 중대 지휘장교가 말했다 // 살아남은 사람은 /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 모두 살려주겠다고 // 이 말에 주검 속에서 / 살아 있는 / 53명이 일어났다 // 장교가 사격명령을 내렸다 // 다시 그가 말했다 // 이번에 살아남은 사람은 / 진짜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 빨리 동네로 돌아가라 했다 / 11명이 일어나 / 동네를 향해 뛰어갔다 / 그러자 등 뒤에서 /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하느님’, 20권).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국회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지만, 1961년 5·16군사쿠데타와 더불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들은 오히려 용공분자로 낙인찍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하며 수십 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후 2000년에 유족과 학계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가 발족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설립되어 진실 규명 작업에 나서게 된다(위원회가 2007년에 발표한 함평 민간인 학살의 조사결과에는 249명 집단 총살, 9명 부상으로 기술되어 있다). 
 
거창 민간인 학살
 
함평의 경우가 확대·반복된 것 같은 거창사건은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1951년 2월9일부터 11일까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벌어졌는데, 이미 2월7일부터 이웃한 산청군, 함양군 일대에서도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이것은 연대작전명령에 의한 공식적인 학살사건으로, 역시 11사단장 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에 따라 ‘작전지역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모두 소각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될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영화 ‘청야’의 한 장면. ‘청야’는 6·25 전쟁 중 당시 국군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 주민 719명을 공비와 내통한 ‘통비분자’로 몰아 집단학살한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다.
 
“1951년 1월 이철수는 열네살이었습니다 // 할머니 유분녀 / 아버지 이종묵 / 어머니 백씨 / 동생 철호 / 머슴 박서방 / 식모 쌍가마 참례 / 이렇게 여섯이 빨갱이라는 죄로 학살당했습니다 // 그런데 / 외갓집 갔던 철수와 누이동생 복남이는 살아남았습니다 // 국군은 / 열살짜리 복남이를 끌어다가 / 손바닥에 못 박아 / 빨갱이라고 말하라고 협박했습니다 // 빨갱이 아니어요 / 빨갱이 아니어요 / 하고 마구 울부짖었습니다 // 그러다가 / 빨갱이입니다 / 하고 말해버렸습니다 / 기절했습니다 // 세상은 얼어붙었습니다 / 하늘 / 푸르게 / 푸르게 얼어붙었습니다 // 오빠 철수는 / 세상이 무서워 / 국군이 무서워 / 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 어이할 수 없이 / 빨치산 소년이 되었습니다 // 1956년 / 대전 적십자병원 간호원 이복남 / 오른손바닥 못 박혔던 흉터 조용합니다 / 어린 시절 오른손잡이가 / 이제 왼손잡이로 바뀌어 조용합니다 / 피하주사 주삿바늘 들어갔는지 아닌지 모르도록 / 주사 잘 놓았습니다 / …”(‘거창 이복남’, 16권).
 
1996년 1월5일에 공포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하면, 거창사건 등은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병력의 작전수행 중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신원면 주민 약 1000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하여 군경,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전원 719명을 박산골짜기에서 집단사살한 뒤 은폐를 위해 시체를 불태운 이 사건은 전체 사망자의 절반이 14세 이하의 어린이로, 이후 대대장 한동석이 피학살자 숫자를 187명으로 축소해 공비 및 통비분자를 소탕했다는 전과보고를 하게 된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이름 / 청야작전! // 신원국민학교 교실마다 잡혀온 1천여명 / 한 장교가 / 이중에 군경가족 있느냐고 물었다 / 몇가족이 나왔다 / 사실이었다 // 또 몇사람이 나왔다 / 사실이 아니었다 / 살기 위해 / 군경가족이라고 말했다 // 그때 면장 박영보가 나섰다 / 유들유들한 얼굴 / … /그가 한 사람을 끌어냈다 / 네가 무슨 군경가족이가 / 또 한 사람을 끌어냈다 / 네가 무슨 군경가족이란 말이가 // 오백 몇십명 면민들 패패이 묶여갔다 / 비탈진 산자락 / 후미진 산골짝 거기 총소리 퍼부었다 / … // 10년 뒤 4월혁명이 왔다 // 위령비 세우는 날 / 피살자 가족들 / 박영보네 집에 몰려갔다 / 십릿길 / 그를 끌어다가 / 무덤 앞에 세웠다 // 그가 도망쳤다 / 사람들이 돌멩이를 마구 던졌다 / 도망치다 쓰러졌다 붙잡았다 불태웠다 // 1년 뒤 5·16쿠데타가 왔다 / 사람들은 / 박영보 살해사건으로 체포되었다 // 지난날의 청야작전 아직껏 욱대기 펴 끝날 줄 모른다 길고 길다”(‘박영보 면장’, 16권).
 
1960년 박영보 사건이 일어나고 거창 피학살자 유족들이 학살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정부에 촉구하자 국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경남, 경북, 전남 등 3개 반으로 나뉘어 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 현장조사를 벌이게 된다. 이때 신원면에 파견된 조사단을 방해하기 위해 ‘공비’를 조작한 인물이 당시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자 헌병 부사령관인 김종원이다. 그는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여순사건에서 일본도를 휘두르고 보도연맹원 학살에도 관여한 자이다. “일인에게 개 / 만인에게 이리 / 사람 속에 / 이런 사람이 없다면 / 어찌 개도 이리도 / 사람 속에 있겠나 //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 이승만의 개 / 신성모의 개였다 // 거창양민학살사건은 / 아무리 군이 숨겨도 하나하나 드러났다 / 국회조사단 / 임시수도 부산에서 / 거창군 신원면으로 갔다 // 김종원의 머리가 빨리 돌아갔다 // 국군을 / 지리산 빨치산으로 위장시켜 / 따발총 위협사건을 하자 / 조사단은 / 나 살려라 도망갔다 // 그뒤 그는 작전명령 위반죄로 / 군사재판 3년 선고였는데 / 두어 달 뒤 / 이승만 특별사면 / 신성모 장관 형집행정지로 내보냈다 // 개주인 이승만의 아까운 개 / 군인 대신 / 경찰관으로 특채 / 경찰국장 / 치안국장 / 다시 만인의 이리였다 // …”(‘김종원’, 16권).
 
5·16쿠데타가 발생하자 피학살자 유족회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거창의 경우 6명이 구속되었고, 유족들이 4·19 후에 만든 합동묘지 봉분은 파헤쳐졌으며 위령비는 쪼개져서 땅속에 파묻혔다. 사건이 일어났던 1951년 국회에서 학살 사실을 폭로한 거창 지역구 신중목 의원은 “밤마다 협박받았고” “날이 날마다 고독했다 / 그의 지역구는 지옥이고 / 그의 마음도 지옥이었다 // 그의 고향에는 그에게 표를 찍은 학살당한 원혼들 바람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신중목’, 16권). 반면 김종원의 경우처럼, 제9연대 연대장 오익경,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 등도 특사로 풀려났고, 11사단장 최덕신은 외무부장관, 서독 주재 대사 등을 역임한 후 미국으로 망명, 그 후 1986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고위직에 있다가 이른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하니 남북 정권들의 작태에 통탄할 일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원문: 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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