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영암-③] 달 밝은 월출산은 그렇게 목 놓아 울어댔다
좌-우익 분풀이가 불러온 ‘광분의 집단학살’
  • 정찬대 기자
  • 17.07.0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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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음식 해 나르느라 겁나게 애 먹었어”

 

냉천마을에서 여운재를 넘어 곧장 영보마을로 향했다. 군경 토벌대의 동선을 쫓기 위해서다. 여운재에 오르니 황금빛 들녘이 한눈에 펼쳐졌다. 빨치산이 이곳에 매복한 이유가 분명했다. 드넓은 평야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이고, ‘남도의 금강산’ 월출산은 영암을 품어 안은 채 부챗살처럼 넓게 퍼졌다. 월출산 스무 골, 댓개비(대오리) 마디마디에서 몰아친 살바람에 응수라도 하듯 여운재에서 불어온 맞바람은 꽤나 매서웠다.

 

영보는 영암의 대표적인 반촌(班村) 마을이다. 1932년 6월 조선독립 쟁취를 위한 ‘영암영보농민독립만세시위사건’의 발상지일 만큼 정치·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크다.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집성촌인 영보는 모두 12개(내동·서당동·관곡·참새굴·노로동·솔안·홍암·장동리·운곡·송석정·선암·세류정) 부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또 다른 반촌 구림마을(군서면)과 함께 아직까지 마을 동계가 운영되고 있다. 그만큼 동성촌의 결속력이 대단하다.

 

△영암 영보마을 입구 영보정에서 바라본 형제봉.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는 목포 유달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수복 초기 영보는 군경과 빨치산의 경계였다. 낮에 영보까지 들어온 경찰이 밤이면 영암읍으로 후퇴했고, 금정에 주둔한 빨치산이 밤이면 영보까지 내려왔다. 금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만큼 좌우익 양쪽으로부터 적잖은 피해를 봤다.

 

가옥이 모두 불탄 상태에서 주민들은 인근에 뗏막을 짓고 생활했다. 땅을 깊게 파고, 야트막하게 움막을 지어 한겨울 칼바람을 막았다. 이마저도 3개 부락 주민들이 한 움막에서 생활할 만큼 안은 비좁았다. 그나마 서로의 온기가 겨울을 나는 버팀목이 됐다.

 

금정면을 수복하기에 앞서 토벌대는 영보마을 형제봉에 주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 높진 않지만 정면으로 월출산과 마주하고, 뒤로는 금정면(연보리)과 경계한다. 그만큼 지리적 요충지인 셈이다.

 

주민들은 목포 해병대가 이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61년에 펴낸 <영암군지>에 따르면 당시 영보마을 형제봉에는 ‘유달부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유달부대장 박준옥도 진실화해위 참고인 조사에서 “1950년 12월경 목포 청년 43명과 영암에 들어왔고, 영보 고지를 담당했다”고 진술했다. 유달부대는 우익 청년단임에도 영암경찰서 소속으로 편재돼 토벌대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만큼 전횡도 적지 않았다.

 

영보 주민들은 “형제봉에 음식 대느라 애를 먹었다. 군인들이 고약했다”고 털어놨다. 내동부락 정도섭 씨는 “반찬을 해갖고 가면도로 엎어불고, 닭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그런 귀한 것만 해오라고 해서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난 집 찾아서 금정면까지 돌아댕겼다. 불 맞은 소나 돼지를 가져다 먹고 그랬다”고 말했다. 같은 부락 이재천 씨도 “밥해 날라라, 뭐 해 날라라 해서 사람 꽤나 귀찮게 했다”며 “밤에는 형제봉에 올라 보초까지 섰다”고 거들었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 좌익의 편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 마을 어귀에 들어선 토벌대에 환대식을 해주곤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음식과 술대접이 요구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환대식이 없다며 주민을 사살한 경우도 있었다.

 

전쟁, 힘없는 민초들만 피해 보다

 

익명을 요구한 김 모 씨(영보마을 거주)는 1950년 초겨울의 상황을 묻자 눈시울 먼저 붉혔다. 그의 누나(당시 19세)는 군경을 피해 금정면 다보마을(연보리)에 들어갔다가 언제부턴가 빨치산과 함께 이동했다.

 

△영보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월출산의 모습. ‘남도의 금강산’ 월출산은 영암을 품어 안은 채 부챗살처럼 넓게 퍼졌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늦가을 지령을 받은 누나는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로 향했다. 그곳에 주둔해 있던 빨치산 부대를 다보까지 안내하는 것이 누나의 역할이었다. 이들은 토벌대에 맞서 합동작전을 계획 중이었다. 도착 예정 시각은 동 트기 전. 하지만 영암읍과 강진읍은 이미 수복이 된 상태여서 길목마다 군경이 지키고 서 있었다. 큰길을 피해 산길로 이동했고, 월출산 중턱을 넘어 강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초저녁에 출발했지만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월출산 천황봉에 걸려 있던 보름달은 구정봉을 넘어 어느새 서해를 비추었다. 월남마을에 도착할 무렵 자연의 질서가 쳇바퀴 돌듯 천황봉 언저리에 또다시 동이 트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부대 합류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질 즈음 왔던 길을 따라 금정면으로 되돌아왔다. 허나 누나는 심부름을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다보마을 앞 논두렁에서 죽임을 당했다.

 

김 씨는 “강진 지역 빨치산 부대를 언능 못 데리고 왔다고 해서 다보네 밭둑에다 놓고 패 죽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탄 하나도 아끼는 사람들이라 대창이나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누나 시신을 찾아 인근 산마루에 안장시켰다.

 

김 씨는 “전쟁이란 결국 민초들이 피해 보는 것”이라며 “우리 같은 힘없는 사람들이 민초”라고 말했다. 이어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자기들끼리 싸우고 전쟁하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게 참 우습다”고 허탈해했다. “그런 덧없는 시상(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산수(傘壽·80세)를 지나 미수(米壽·88세)를 바라보는 그는 ‘인생의 허망함’을 그렇게 표현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지난 연재 보기]

 

<다음은 ‘전남 영암편’ 네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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