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영암-⑤] 달 밝은 월출산은 그렇게 목 놓아 울어댔다
좌-우익 분풀이가 불러온 ‘광분의 집단학살’
  • 정찬대 기자
  • 17.08.0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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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우익 인사 처형, 지와목 방화 사건

 

1950년 10월 초 영암읍이 수복됐으나 구림은 여전히 좌익 치하에 있었다. 구림마을 인근 도갑사 뒤편에는 빨치산이 토굴을 파고 생활했으며, 마을 자위대가 구성돼 군경의 진입을 막았다. 주민들이 야경을 선 것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첫 포위 작전이 있기 전 구림에서는 좌익에 의한 우익 인사 처형이 이뤄졌다. 바로 지와목 방화 사건이다. <호남명촌 구림>에 따르면 1950년 10월 7일(<영암군지>는 ‘4일’로 기록했으며, 진실화해위는 여러 정황상 ‘5일’로 추정함) 마을로 내려온 인민유격대들이 지와목에 위치한 주막에 기독교 신자 여섯 명과 경찰 가족 등이 포함된 우익 인사 28명을 감금한 뒤 불을 질렀다. 이튿날 시신은 뒤엉킨 채 새카맣게 굳어있었다.

 

△지와목 사건이 발생했던 옛 주막 터(사진 가운데 그늘진 곳). 산허리를 갈라놓은 지방도 819호선(왕인로)에 자리한 이곳은 영암-목포 간 왕래 도로로 많은 이들이 오갔던 길목에 위치해 있다. 현재 주막 터 옆으로는 주거변천사야외전시장 주차장이 놓여있다.ⓒ커버리지(정찬대)

  

지와목 방화 사건이 발생한 지 3일 후 불타 없어진 주막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이후 1976년 10월 한국반공연맹이 주축이 돼 이곳에 순절비를 세웠다. 허나 군경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또 다른 주민들은 ‘반쪽짜리’ 위령비를 보며 숨죽이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여기 공산괴뢰의 6·25 남침으로 집단 학살을 당한 고귀한 넋이 묻혀있다.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온갖 박해와 탄압을 끝까지 항거하다 1950년 10월 7일 우리 경찰이 영암읍을 수복하자 궁지에 몰린 공산잔당은 애국지사, 대한청년단원, 교인 및 양민 등 28인을 군서면 구림리 신근정 민가에 가두고 불을 놓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당의 잔인한 만행을 규탄하면서 여기 순절한 합동순절분묘를 세운다”(지와목 사건 순절비 비문 중에서)

 

지와목 사건이 발생하고 열흘 뒤 첫 포위 작전이 이뤄졌다. 구림에서 만난 한 주민은 “경찰 가족을 죽이니깐 분풀이로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좌익한테 죽어서 순절비도 세우고 그랬지, 군경한테 죽으면 뭔 말도 못하고 그랬다”며 수십 년간 입 닫고 지낸 세월을 토해냈다.

 

1·4 후퇴, 그리고 또다시 학살

 

전쟁 초기 일전일퇴를 거듭한 남북 전선은 널뛰듯 급변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9·28 수복, 그리고 압록강 전선에서 또다시 1·4 후퇴까지. 그렇게 7개월간 점령과 수복이 엎치락뒤치락 반복됐다.

 

1950년 10월 9일 국군과 유엔군이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을 시도했다. 이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중공군 개입을 승인한다. 모택동과 스탈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총 일곱 차례 걸쳐 이뤄진 대공세에서 중공군은 1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고, 소련은 대포와 탄약 등의 무기를 대거 공급했다.

 

국군은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밀려났다. 여기에는 중공군 개입을 무시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오판도 한몫했다. 12월 4일 평양 철수 작전이 시작됐고, 12월 14일부터 10일간 동부전선 5개 사단 병력 10만 5000명과 피난민 10만 여 명이 흥남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중공군의 1·2차 공세가 이어지면서 12월 25일경 공산군은 38선 이북을 대부분 회복했다. 그리고 3차 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8일)에서 서울 중앙청에 걸린 태극기가 인공기로 바뀌었다. 이른바 1·4 후퇴. 1951년 1월 4일 국군은 그렇게 서울에서 퇴각했다. 이후 평택-제천-삼척을 잇는 선까지 후퇴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까지 밀려났다.

 

전황이 급변하자 후방도 다급해졌다. 군경 토벌대의 작전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후방 교란을 시도하던 빨치산들의 게릴라전도 한층 강경해졌다. 영광·함평 지역 불갑산 토벌 작전이나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발생했다.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통한 회유 작전도 수시로 이뤄졌다. 항공기를 통해 골마다 삐라가 뿌려졌고, 확성기를 이용한 귀순 권고 방송도 무시로 전개됐다. 자수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효과는 컸다. 한겨울 추위와 배고픔에 하나둘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월출산 입산자들도 상당수 마을로 되돌아왔다. 동구림리 고산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자술서를 쓴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자수한 이들은 영암경찰서에서 신원 특이자로 분류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1·4 후퇴 후 또다시 이들에게 피울음의 먹구름이 드리운다.

 

△구림마을에서 만난 최철호씨는 한국전쟁 당시 경찰 토벌대에 참여했다. 최씨는 1.4후퇴 후 자수한 주민들을 상대로 또 다시 대량학살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커버리지(정찬대)

 

구림마을에서 만난 최철호 씨는 1951년 1월 20일경 경찰이 자수자 140여 명을 영암에서 금정으로 넘어가는 방공호에 몰아넣은 뒤 모두 총살시켰다고 증언했다. 당시 토벌대에 참여한 최 씨는 “자수한 사람 불러들여서 방공호로 끌고 가 쏴 죽였다”며 “경찰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닌 뒤 해방과 함께 돌아온 그는 이내 군경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스물한 살, 1950년 당시 장성했던 그를 군경이 가만둘 리 만무했다. 다만, 일본에서 수학했기에 경찰도 크게 해코지하진 않았다. 1950년 12월 12일 그렇게 신분이 회복됐고, 경찰과 함께 토벌대에 참여했다.

 

“방공호 옆에만 가도 까막까치(까마귀와 까치)가 우글우글했어. 사체나 옷을 개들이 물고 댕긴게 바닥에 옷가지가 궁글러다니고 난리가 아녔제. (가족들이) 시신을 파가면 기동대들이 총을 쏴분게 (시체 찾으러 왔다가) 지게고 뭐고 그냥 놔불고 도망가붔어. 내가 호위해서 동네 사람 세 명을 옷보고 찾아줬는디, 하도 시체가 많은게 끄집어냈다가 이녁 식구 아니면 도로 내불고 그랬어”

 

최 씨는 방공호의 모습을 이같이 증언했다. 총살된 이들이 부역혐의자로 분류돼 사살된 것인지, 아니면 보도연맹 사건과 마찬가지로 급변해진 전황에 따라 또다시 ‘예방 학살’을 실시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최씨 증언대로라면 이들은 그저 산을 내려와 자수한 뒤 마을에서 생활한 평범한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용서와 화해, 적개심을 걷어내다

 

구림에서는 260명의 주민이 보복의 악순환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상흔은 적개심으로 표출됐고, 이후 팽팽한 긴장감이 마을을 휘감았다. 집성촌인 까닭에 화해는 더디었고, 그 사이 60년 넘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왕인박사 유적지 맞은편에는 지와목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한 순절비와 좌-우익 모두에게 피해를 당한 이들을 위한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 함께 세워져 있다.ⓒ커버리지(정찬대)

 

“한 많은 이 세상 좌와 우에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임이시여.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 결코 지울 수 없는 임들의 탑명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라 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의 뒤늦은 속죄를 물리치지 마시고 월출산 기슭에 고이 잠드소서”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비문 중에서)

 

지난 2006년 구림은 분노의 적대감을 걷어냈다. <호남명촌 구림> 발간은 ‘작은 화해’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해 말 좌우익 만행으로 찢긴 상처를 보듬어 안자는 의미로 합동 위령제를 모셨다. 가해자를 지목하지 않은 채 오로지 희생자만을 위한 위령제가 올려 졌고, 산 자와 죽은 자는 손을 맞잡았다. 왕인박사 유적지 맞은편(구림공업고등학교 언덕 뒤) ‘지와목 사건 순절비’와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은 그렇게 한자리에 세워졌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지난 연재 보기]

 

<다음은 ‘전남 화순편’(보강기사)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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