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화순-⑥] 골골이 밴 상흔,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인민군 복장한 軍…대량학살 불러오다
  • 정찬대 기자
  • 17.09.0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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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 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 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전남 화순 지역과 관련해 보강 취재를 한 원고입니다. 앞서 연재된 전남 화순편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보순씨 관련 사연은 ‘전남 화순⑤’와 '전남 화순⑥' 두 번에 걸쳐 나눠 연재합니다.

 

“남이냐, 북이냐” … “남이오”

 

김보순 씨는 1월 중순 충북 단양에서 풍기 방향으로 남진 중이었다. 하지만 유엔군의 반격에 더 이상 진격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동상까지 얻어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단양에서 치료를 받던 그는 결국 1월 22일 유엔군 포로가 됐다.

 

“운이 좋았어”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유엔군이 아닌 국군에 잡혔다면 분명 그 자리에서 총살됐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속 부대원 예닐곱 명과 함께 경북 영주비행장에서 후송돼 부산 포로수용소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동상을 치료한 뒤 거제포로수용소로 옮겨 왔다.

 

△거제포로수용소 모습(사진=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한 공간에 두 개의 조국이 존재한 곳, 거제포로수용소는 남북 대치의 또 다른 상징이자 축소판이다. 포로 20만 명은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어 분열했고, 갇힌 우리 속에서 또다시 편이 갈려 대치했다.

 

수용소는 포로와 군인뿐만 아니라, 포로들 간에도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북송을 거부한 반공 포로와 송환을 희망한 친공 포로가 맞서면서 유혈 사태가 빚어졌고, 친공이 장악한 몇몇 수용소는 막사를 드나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1952년 2월 친공 포로의 공격으로 미군 한 명이 사망하고 포로 77명이 숨졌으며, 3월에는 막사 옆을 지나던 경비대 행렬에 반공 포로가 투석을 가한 것이 계기가 돼 포로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만, ‘투석 사건’과 관련해 김보순 씨는 그간의 통설을 뒤집는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군인들이) 한 사람 앞에 돌 몇 개씩 쥐어주며 (친공 포로들에게) 던지라고 했다. 맞아서 소리 지르는 사람,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국군과 반공포로가 무력 진압의 빌미를 먼저 제공했다는 설명이다.

 

△포로들에게 납치 되었던 도드 준장(좌)과 이후 새로 부임한 보트너 준장(사진=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사달은 1952년 5월 7일 벌어졌다. 거제포로수용소장 프랜시스 T. 도드 준장이 친공 포로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포로의 포로’가 된 도드는 비록 3일 만에 풀려났지만, 수용소는 이후 일대 혼란에 빠졌고, 수용소장 역시 두 번이나 교체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1952년 5월 리지웨이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오른 마크 W. 클라크 대장은 수용소 치안에 대한 강경책을 구사했고, 신임 수용소장인 헤이든 L. 보트너 준장이 6월 10일 공수특전대와 탱크를 앞세운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도하면서 ‘거제도 포로 소요 사건’은 도드 석방 한 달 만에 일단락됐다.

 

친공과 반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3월, 전국 각지에서 정보과 형사들이 몰려왔다. 수용소 한켠 하얀 천막 안에선 수많은 포로가 무릎을 꿇은 채 심사관 앞에 섰다. 개인 신상카드를 받아든 이들은 곧바로 면회를 시작했다. 전향 심사다. 김보순 씨 고향인 화순경찰서에서도 사람이 나왔다.

 

“남이냐, 북이냐”

질문은 거두절미했다.

 

“남입니다”

답변 역시 짧고 간결했다.

 

“남이냐, 북이냐 그 한마디만 묻는다. 남으로 갈 것이냐, 북으로 갈 것이냐를 묻는 것인데, 나는 남으로 가겠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형님이 경찰이었고,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오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포로들은 심사 후 분리 수용됐고, 6월 소요 사태 진압 후 북송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거제를 비롯해 용초도, 봉암도 등지로 옮겨졌다. 반면, 송환을 거부한 이들은 제주·광주·논산·마산·영천·부산 등지로 흩어져 수용됐다.

 

1952년 8월, 북송을 거부한 김 씨는 아침부터 이송 준비를 서둘렀다. 이를 본 친공 포로들이 수용소를 나서는 트럭에 대고 있는 힘껏 가래침을 당기더니 ‘퉤’ 하고 내뱉었다. 그런 다음 쌍욕을 퍼부어댔다. ‘배신자’라는 비아냥과 야유가 곳곳에서 쏟아졌다.

 

마산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첫날 무장한 군인이 수용소 인근에 집결했다. 인민군이 온다는 소식에 지역 유지들이 군경에 치안 유지를 요청한 것이었다. 반공 포로임을 알리려는 듯 이송된 포로들은 큰소리로 군가와 애국가를 복창했다. 군경과 시민들은 그제야 철수했다.

 

△화순 도장리에서 만난 김보순씨(우)와 김범순씨 형제(사진=정찬대)

 

1952년 추수 무렵 김보순 씨는 화순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동생과 가족들은 무사했다. 안도감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몇 개월 고향에서 지낸 뒤 이듬해 3월 6일 국군에 재입대했다. 논산에서 훈련받고 국군 1사단에 배치돼 다시 인민군에 총부리를 겨눈 그는 서부전선의 끝자락, 경기 연천에서 7·27 정전협정을 맞았다.

 

한국전쟁 3년, 20대 초반의 한 청년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인민군이, 또 때로는 국군이 되어 또 다른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그렇게 그는 모진 자신을 지켜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지난 연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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