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소용돌이 속의 러시아 화가들
[인문학 두드림] 사실(事實)과 현실(現實) 사이에서
  • 유재원 칼럼
  • 15.06.2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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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의 작품『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혁명가를 맞이하는 가족들의 어색한 표정과 굼뜬 동작에서 사실(寫實)은 엄연히 단순한 사실(事實)을 넘어선 현실(現實)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어디에나 사실(事實)은 있고 그 배경에는 현실(現實)이 있다. 그 사실이 진실인지는 모르나, 그것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문학, 음악, 역사, 철학 등에도 사실과 현실을 탐구하는 사실(寫實)주의가 있겠지만, 미술의 사실주의(realism)는 눈앞에서 펼쳐진 인간 군상들의 표정을 통해 삶의 속내를 읽을 수 있기에 역시 생생하다.

 

미술사에서 사실(寫實)주의는 요즘말로 ‘레알(real을 희화화한 용어)’로 ‘찐(津)’한 이미지다. 뭐 사조라고 할 것도 없다. 사실주의 화풍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을 넘어뜨리고도 남을 ‘인간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가의 예술적 진가(core)일지 아니면 작가가 접한 세상 인간들의 민낯일지는 모르나, 보는 사람들이 느낄 충격(?)은 다른 사조의 화풍에 비해 강렬하다.

 

△쿠르베의 작품 『안녕하세요 쿠르베씨』(좌)와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

사실주의의 원조는, 쿠르베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라는 작품이다. 화가가 이웃을 만나 인사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인데, 출품 당시에는 작가의 의도부터 예술성까지 의심받으며 미술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다. 또 사실주의의 걸작으로서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루브르博에서 꽤 유명한 작품)이라는 작품이 있다. 나중에 법률적인 문제로도 비화된 ‘생존비극(食人)’을 극(極)사실적으로 그려냈는데, 죽어가는 사람들을 짓이겨가면서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구하는 행태는 무척 처절하다. 회화화된 사건의 한 장면을 통해서도 쉽게 인간사의 비정함과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지난 겨울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뜨레쨔코프) 미술관에서 접하게 된 러시아 사실주의는 유럽, 미국의 사실주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주었다. 단지 일상 속의 이야기라던가 비극적인 사건을 극화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를 철저히 현실적으로 파헤치는 탐정(探偵) 분위기가 짙게 풍겨져 나온다.

 

△일리야 레핀의 작품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

러시아. 예전부터 소련(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이 익숙했던 나라다. 불과 백 년 전에 지주와 농노계급의 갈등에서 시작해서 도시노동자의 집단행동으로 왕조와 귀족계층을 몰아낸 혁명 역사를 가진 나라다. 구체제의 폭압이 지속되면서 혁명이 잉태되었고 무력혁명으로 봉건사회를 낫과 망치로 부수어 새로운 나라가 창조된 바다.

 

이러한 곳에서 태어난 사실주의 미술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로 혁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 지식인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부터 굶주림과 핍박에 저항한 농민·노동자의 혁명까지 많은 사건을 접하게 된 러시아 미술가들은, 답습적인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맨손·맨발과 기운 옷가지 등을 예술로 승화하기에 이른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 ~ 1930)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라는 그림을 보면, 배를 강가로 끌어오는 인부들의 몸짓과 표정이 무척이나 사실적인데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한다. 고된 노동을 견디는 인부들을 그려낸 것임에도, 인간의 ‘삶’과 ‘노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고민하게 하는 그림이다.

 

또 다른 거장 페로프(Vasily Grigorevich Perov, 1833~1882)는 작품의 영감을 쥐어짜내는 병약한 소설가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화가는 세상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거장 도스토옙스키가 사실 도박중독에 빠져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접하고는, 영감을 구하려 외로이 생각을 거듭하는 문학가의 모습을 그려내려 했다. 페로프의 다른 역작 『트로이카』(삼두마차를 빗댄 말)에서는 고된 도시의 삶속에서 아이들까지 힘든 노동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러시아의 굶주린 현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 『트로이카』.

혁명의 소용돌이 속을 경험한 화가 레핀, 페로프, 수리코프, 브루벨이 이루어낸 러시아 사실주의는 ‘이동파(민중 속으로 이동한다는 의미, 혹은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순회 전시했다는 의미)’라고 불렸다. 그만큼 그들은 신이 주신 재능을 보통 사람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으며, 작품들을 통해 러시아의 현실을 개탄하고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러시아 사실주의는 단지 귀족, 성직자, 법조인,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에 치중하지 않았고, 혹독한 현실에서 질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훗날 러시아 사실주의(혹은 이동파)는 하나의 예술 사조를 넘어서서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었다고도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사실과 현실 사이에서 러시아 화가들은 ‘현실’을 선택했다. 그 현실이 사실이건 진실이건 간에 작가의 눈에 드러난 ‘그대로’를 재현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민낯을 가감 없이 그려낸 러시아 리얼리즘의 전통은 인류의 인생이 단지 생존에 그치지 않고 인간 군상의 존엄한 역정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유재원  변호사(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입법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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