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은 미미하나 영향력은 건재하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 동교동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뒷방으로 밀려나갈 것 같던 이들이 정치 행보를 위한 기지개를 켜며 운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친노(친노무현)에 몸살을 앓고 제3선택지 국민의당을 택한 동교동계는 호남 압승을 계기로 다시금 정치 전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호남 정치 복원이 자칫 특정 집단의 이익, 즉 가신 정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신이 아닌 물질의 정치로 변질될 것이란 지적이다. <편집자 주>
‘호남 압승’ 틈타 전면에 나서는 동교동계
“정동영 당권 도전? 턱도 없는 소리…그건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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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국민의당 상임고문.(사진=더불어민주당) |
동교동계가 보폭을 넓히고 있다. 물밑 움직임은 어느새 수면 위로 올랐다. 총선 승리를 발판삼아 정치적 목소리도 키우고 있다. 지난 1월 권노갑 상임고문을 주축으로 한 동교동계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할 당시 고마움에 인색했던 안철수 공동대표는 ‘호남 압승’ 후 전에 없던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당내 동교동계 위상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지난 19일 동교동계가 4·13총선 뒤 처음으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권노갑 고문, 박지원 의원, 김옥두 전 의원 등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또 전북 전주에서 생환한 정동영 전 의원도 함께했다. 이를 두고 당 안팎에선 여러 정치적 해석이 나왔다. 정 전 의원의 당권 출마 가능성부터 동교동계가 ‘호남 맹주’로 또 다시 정동영을 밀고 있다는 분석까지 다양했다.
국민의당으로 둥지를 옮긴 동교동계는 호남 압승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이을 유력인사가 마땅치 않다. 구민주계 좌장격인 박지원 의원을 포함해 광주에 천정배 공동대표, 전북에 정동영 전 의원이 손에 꼽힌다. 두 사람은 대권 잠룡으로 분류되는데 있어 다소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참여정부 이후 당 패배에 대한 원죄가 무겁다.
더욱이 철새 정치인이란 비아냥 속에 지역 민심도 예전만 못하다. 전북 전주에 출마한 정 전 의원은 세 차례에 걸친 전국 최다 득표가 무색하게 이번 선거에서 상당히 고전한 끝에 신승(辛勝)했다. 이 때문에 중앙무대에 서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정치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던 동교동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와 친노계 등쌀에 못 이겨 그간 ‘뒷방 늙은이’로 취급받았다. 친노 패권주의 논란 속에서 존재감은 사라졌고, 당의 어른으로서 후배들의 활동을 지켜봐달라는 강요가 주입됐다.
권노갑 고문이 더민주를 탈당할 당시 자리에 배석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권 고문 뒤 곧바로 탈당 기자회견이 예정된 최원식 의원이 좀 더 일찍 국회 정론관을 찾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것이 전부다. 최 의원은 “60년 야당 역사를 자랑하는데, 이 중 55년가량을 함께하신 분”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더민주는 동교동계를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존재로 인식했다. 동교동계 핵심 인사는 당시 본지와 만난 자리에서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니냐. 그래도 우리 당의 큰 어른이신데, 진짜 이렇게 해선 안 된다”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권노갑-정동영 회동, 무슨 얘기 오갔나
지난 2월 권 고문이 전북 순창을 찾았다. 야인으로 있는 정동영 전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 전 의원의 국민의당 합류를 요청했다. 특히 정 전 의원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호남 맹주’ 자리를 약속했다는 전언도 여의도 정가에 파다하다. 이를 반영하듯 권 고문은 이날 “60년 정통야당의 적통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후보였던 정 전 의원도 그 한 축으로서 함께 하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정 전 의원이 국민의당에 입당하면 우리도 입당하겠다”며 힘을 실어준 것으로 전해졌다.
정 전 의원의 국민의당 합류 논의는 이후 급물살을 탔고, 곧바로 안철수 공동대표와 회동을 가지면서 전격적으로 입당이 성사됐다. 권 고문과 만난 지 불과 일주일여 만에 이뤄진 일이다.
두 사람은 구원(久遠)으로 얽힌 관계다. 정 전 의원의 정치 입문을 이끈 이도 권 고문이다. 1995년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정치판에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회의를 창당, 대대적인 인재영입에 나선다. 당시 이를 주도한 인물이 ‘DJ의 오른팔’ 권노갑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정동영 당시 최고위원을 비롯한 당 쇄신파들의 2선 후퇴 요구가 이어졌고, 권 고문은 결국 ‘순명(順命)’이란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른바 ‘정풍운동’ 사건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정치판의 속성을 실감케 한다.
동교동계와 정동영 모두 친노의 등쌀에 밀렸다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있다. 또 호남을 중심으로 한 구민주계 적통이란 점에서 양측 간 공감대가 형성된다. 동교동계가 정치적 낭인으로 지내온 정 전 의원에게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동병상련’인 셈이다.
총선을 앞둔 지난 10일 권 고문은 전주지역 합동유세 현장에서 “정동영 후보야말로 호남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또 “방송국 기자로 있던 정 후보에게 정치입문을 권유했던 사람이 저다”며 그와의 인연을 강조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철학을 제대로 알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정동영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동교동계가 정동영을 통해 정치 전면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됐다.
박지원 원내대표 추대, 차기 당권은?
지난 26일 구민주계 좌장격인 박지원 의원이 국민의당 신임 원내대표로 합의 추대됐다. 이에 대해 당내에선 동교동계에 힘이 실린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의원은 당초 당권 도전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안철수 대표의 거듭된 설득과 전당대회 연기론이 힘을 받으면서 이를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의원이 원내대표로 추대된 상황에서 차기 당 대표는 구민주계 진영이 아닌 중도적 인물이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힘을 받는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당 핵심 관계자는 본지와 통화에서 “박 의원이 신임 원내대표로 추대된 상황에서 당권은 중도나 안철수계 쪽에서 쥘 가능성이 있다. 동교동계는 원내수장을 맡는 것으로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이 호남정치의 부활을 내세우며 당권 도전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정치권 안팎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그가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됐다. 현재 국민의당에 참여하고 있는 동교동계와 호남 지역구 인사들은 ‘당권-대권 분리론’을 제기하며 안철수 대표의 2선 후퇴를 요구하고 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정동영-천정배-박지원이라고 안철수를 좋아하겠느냐. 그냥 잠시이해관계가 일치하니까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노갑 전 고문도 차기 대선후보로 ‘정동영’을 얘기한다”며 “이 역시도 안철수 대표에겐 불길한 얘기”라고 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동교동계-정동영 밀약설’에 대해 당사자는 강한 불괘감을 드러냈다. 동교동계 핵심 관계자는 막후에서 정동영을 지원한다는 주장과 관련해 “정동영이나 천정배 측에서 자기들끼리 그런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내부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물밑에서도 그런 얘기는 없다”고 반발했다.
그는 “호남 압승으로 분위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이를 계기로 동교동계가 전면에 나서거나 하는 그런 움직임은 없다”며 “박지원 원내대표 추대 외에는 별다를 게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DY, ‘당-대권 도전’ 하마평
정 전 의원은 당권·대권 도전과 관련해 아직까지 조심스런 입장이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에게는 분별력이 중요하다”며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고 했다. 말을 아꼈지만 분명 여지는 열어뒀다. 그는 앞서 국민의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당직에 연연하지 않고 백의종군 하겠다”고 확언한 바 있다.
정 전 의원은 당권 도전과 관계없이 이미 당내에서 지도자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당 대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국회부의장이나 상임위원장직을 노려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당 관계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동교동계와 정 전 의원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서도 “DY(정동영)는 어쨌든 호남에서 가장 유력한 주자 아니냐”며 “안철수라는 확실한 대권후보가 있는 상황에서 정동영을 당권 주자나 요직에 내세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 전 의원의 당권 도전 가능성과 관련해 “그건 탐욕으로 비칠 수 있다. 정 전 의원 자신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분간은 자숙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했다.
커버리지 정유담 기자(media@coverage.kr)
<기사 속 기사>
‘당 대표급 원내대표’…박지원 추대, 이유는?
더민주 ‘맞상대’…대북송금 이후 친노와 앙금
국민의당이 27일 박지원 의원을 20대 국회 전반기 원내대표로 합의 추대했다. 러닝메이트인 정책위의장에는 안철수 공동대표의 최측근인 김성식 당선자(서울 관악갑)가 선임됐다. 통상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은 지역 안배를 고려해 선출한다. ‘호남 자민련’이란 딱지를 떼기 위해서도 박지원-김성식 조합은 효과적이란 평가다.
정치권에선 박 원내대표 선임을 두고 “당 대표급 원내대표가 탄생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때문에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역시 박 원내대표와 맞설 적임자를 찾느라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 원내대표는 대표적인 동교동계 인사로 분류된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14대 국회에서 처음 입성한 그는 민주당과 국민회의에 이르기까지 대변인직을 수행하며 ‘야권의 입’으로 이름을 알렸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박 원내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으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한 친노 진영과 앙금이 깊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당초 당 대표와 대권 도전에 무게를 둔 그는 안 대표의 권유에도 “후배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며 이를 고사했다. 그러나 3당 체제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야 하는 국민의당 입장에선 박 의원과 같은 ‘정치 9단’이 절실하다.
더욱이 당권 경쟁에 따른 분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그의 추대는 간절했다. 안 대표 측에서 ‘박지원 카드’를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에 전당대회 연기론까지 힘을 받으면서 박 의원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이번 추대를 통해 박 원내대표는 2010년 민주당, 2012년 민주통합당에 이어 세 차례나 원내대표를 역임하는 진기록을 갖게 됐다.
정유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