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칼럼] ‘가공’된 시대, ‘날’것으로 산 당신
통사에 가려진 망각, 그리고 개인의 역사
  • 정찬대 기자
  • 16.10.0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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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故백남기 농민의 모습. ⓒ프레시안(손문상)

 

역사는 직조물이다. 사건의 배경과 해석이 날줄과 씨줄이 돼 어지럽고 정교하게 얽혀있다. 사실(Fact)로 믿어온 역사가 늘 정의로운 것만도 아니다. 오죽하면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인공적이다. ‘날’것이 아닌 ‘가공’된 결과물인 셈이다. 권력은 그렇게 역사를 희롱하고 윤간해왔다.

 

한국 근현대사는 민족과 계급모순, 그리고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일궈진 역사다. 민중의 핍박과 아우성이 가장 집약적으로 응결된 시대이자, 군홧발로 짓이겨져 뜯기고 덜어내 누더기가 된 역사이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아프고 쓰리다. 우리가 근현대사를 다시금 살펴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9~1910)는 <국가는 폭력이다>라는 저서를 통해 국가폭력의 무자비함을 지적했다. 아울러 인간을 수단화하는 국가의 속성을 꼬집었다. 그는 주체적 삶을 살고자하는 인간다움과 협의의 공동체를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한다. 물론 그의 주장이 유토피아적 사상이란 지적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정의로운 것으로 인식돼온 국가폭력-실은 소수의 권력집단이 이를 악용했던 역사의 반복-을 꼬집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 그간 다양한 피학살자들과 만나왔다. 칠순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른 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한 노인, 집단 학살지에서 누구의 유골인지도 모를 뼛조각을 부여잡고 한없이 통곡하던 한 유족, 난자당한 부모님을 지켜보며 그저 목숨하나 부지해야 했던 비참함에 평생 죄인처럼 살아온 어떤 이….

 

그런데 우리를 더욱 화나게 만드는 건 그렇게 애달픈 삶을 살아간 이들과 달리 사건 책임자들은 여전히 사회지도층으로 덕망 높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학살은, 국가폭력의 총성은 정당화됐다. 역사는 그렇게 또 한 번 농락당하고 유린됐다.

 

전쟁은 전장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총칼을 든 군인들만의 몫도 아니다.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있는 이들은 몇 곱절 이상의 피와 고통, 그리고 가슴 메이는 아픔과 살 떨리는 공포를 겪어야만 한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진짜’ 전쟁이고 또한 지옥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시간동안 머리는 희끗희끗 세었지만, 점차 옅어질 것이라 믿었던 그날의 고통과 기억은 여전히 크고 또렷하게 남아 이들을 괴롭힌다. 민간인 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이다.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다”  영화 <퓨리>의 명대사다. 우리는 폭력의 역사를 기술한다. 그리고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져버릴 개인의 역사에 주목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그간 통사(通史)에 묻혀왔다. 개인의 처절한 아픔과 읊조림은 외면된 채 인공적인 직조물로 짜여왔다. 그리고 역사를 짓뭉개온 이들은 이를 악용했다.

 

농민 백남기씨가 317일간의 사투 끝에 마지막 호흡기를 뗀 날, 공권력은 그의 차디찬 육신마저 갈취하고자 했다. 오늘의 역사는 또 어떻게 기록될까. 백남기 선생을 애도하는 광장의 열기를 종이삼아 짓밟혀온 망각의 역사를 추도한다. 애달픈 꽃처럼 살다간 이 땅의 모든 한 조각 한 조각 역사를 추모한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본 기사는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에 함께 게재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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