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역사
[현장스케치] 서대문형무소의 ‘광복 70주년’ 표정
“수많은 애국지사 스러진 곳…결코 잊어선 안 되죠”
  • 정찬대 기자
  • 15.08.15 10:01
  • facebook twitter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
  • 글자크기
  • 글자크게
  • 글자작게
  • |
  • print
  • |
  • list
  • |
  • copy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옥사 외벽에 걸린 대형 태극기, 수감자들이 생활했던 옥사, 감방 내에 있는 배식구, 한센병사 뒤편에 있는 감시초소,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힌 대형 현수막,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건물.(사진=정찬대 기자)

 

‘광복 70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은 이 땅의 해방과 광복을 위해 피 흘린 선조들의 얼을 기리며, 다시 한 번 독립의 참의미를 되새겼다. 8월 중순의 뜨거운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50미터가량 줄지어진 시민들 옆으로 애국지사들의 벽화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형무소에 들어선 뒤 발길이 닿은 곳은 독립운동가들의 한과 고통이 서려있는 옥사다. 독립투사들의 선혈로 뒤덮인 양 온통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곳 옥사에 들어서자 화로 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특히, 좁은 감방에 30명 이상을 밀어 넣어 수감했다는 말을 들으니 한숨이 절로 났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은 3·1운동 직후 이곳에 갇혀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올리는 글월’이란 편지글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옥사는 중앙사와 제10, 11, 12옥사가 연결돼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다. 소수의 인원으로 효율적인 감시를 하기 위해 이 같은 구조로 지어졌다. 실제 중앙사에 있는 간수 감시대에 서면 모든 옥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각 옥사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었던 독방이 있다. 어린 학생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독방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학생은 “들어가기 무섭다”며 칭얼대기도 했다.

 

겨우 앉을 정도만 허용되는 한 평 남짓의 공간,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고 습한 이곳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광복의 그날을 염원하며 ‘결기’를 다졌을 테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사형장 입구에 있는 미루나무, 사형장 입구(위), 사형장 안과 밖의 미루나무 모습(아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걸린 태극기, 여옥사 옆쪽으로 현재 발굴 공사 중인 터, 사형장의 시신을 반출하기 위한 시구문.(사진=정찬대 기자)

 

옥사를 빠져나와 한센병사로 향했다. 나병 또는 문둥병으로 잘 알려진 한센병. 전염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들은 철저히 격리돼 생활했다. 형무소의 가장 높은 곳(언덕)에 위치해 있어 몇 개의 시설물이 내려다보이며, 일반 옥사에 없는 온돌이 설치된 점이 특이하다. 한센병사 바로 뒤편으로 독립투사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봤을 감시초소가 높다랗게 설치돼 있다.

 

한센병사 우측 아래편에는 격벽장이 보인다. 부채꼴 모양의 격벽장은 수감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높은 벽으로 각 공간이 나뉘어져 있다. 독립투사들이 운동장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못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격벽장에서의 운동 시간은 철저했다. 어떤 이는 2분30초, 또 어떤 이는 4분, 또 다른 이는 1분20초 이런 식이다. 선조들이 선혈로 지켜낸 이 땅의 후손들은 70년 후 이곳 격벽장에서 숨바꼭질하며 뛰놀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반드시 봐야할 곳이 있다. 바로 사형장이다. 형무소 가장 오른편 으쓱한 곳에 위치한 사형장은 1923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5미터 높이의 담장으로 외부와 철저히 격리돼 있다.

 

사형장으로 가기 전 ‘운명의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일본군은 용수를 씌워 독립군을 이동시켰는데, 왼쪽으로 가면 격벽장, 직진하면 면회장, 오른쪽으로 가면 사형장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사형집행을 알아차리고 사형장 입구에 뻗은 미루나무를 붙자고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을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통곡의 미루나무’라 불리 우는 까닭이다.

 

미루나무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그루가 식재돼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사형장 안과 밖의 미루나무가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에 심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사형장 안의 미루나무는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현재 영양제를 공급해주고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조금씩 말라 죽어가고 있다.

 

사형장 밖 미루나무 꼭대기를 보면 까치둥지가 사람들을 반긴다. 외롭게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달래며 진혼하듯 까마귀는 서대문형무소를 빙빙 돌며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사형장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마주하는 것이 시구문이다. 일제는 독립투사들에게 온갖 문초와 고문을 가한 뒤 사형시켰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은폐하고자 이곳 시구문을 통해 시신을 몰래 반출했다. 사람들은 사형장에 덩그러니 놓인 교수대와 칠흑 같은 어둠의 시구문 안쪽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2015 서대문 독립 민주 축제’ 자원봉사자들이 애국지사들을 담은 대형 그림을 그리는 모습, 서대문형무소 순국순열을 위한 추모비, 한센병사에서 사형장으로 가기 전 전시돼 있는 근현대사 관련 사진들, 자원봉사자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3.1만세운동을 재현하는 모습, 사형장에서 여옥사로 가기 전 아이들이 물총 놀이를 하는 모습.(사진=정찬대 기자)

 

사형장을 지나 여옥사(女獄舍)로 향하던 중 물총을 쏘며 뛰노는 해맑은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한 아빠는 옷이 흠뻑 접은 채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고, 이를 지켜본 엄마는 “옆으로 도망가”라며 웃어댔다.그런 엄마에게도 물총 세례가 퍼부어진다.

 

아이들의 장난을 뒤로한 채 곧장 여옥사로 향했다. 유관순을 비롯해 어윤희 임명애 신관빈 권애라 김향화 열사 등이 3·1운동을 주도하다 이곳에 끌려왔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된 8호 감방은 학생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형무소에 수감된 애국지사 가운데 여성들은 특히 더 힘든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바로 성고문이다.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 고(故) 이병희(1918~2012년) 여사는 당시 수감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비행기고문, 물고문은 수시로 받았다. 더 심한 고문은 자손을 끊으려고 하는 (성)고문이었다. 남자의 성기에 막대를 꽂았고, 여자의 성기에는 막대기를 휘저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

 

여옥사 측면에 바라다보이는 9옥사 건물에 여성독립운동가 266명의 이름과 약력이 적힌 대형 천이 12폭으로 나뉘어 걸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이름도 있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뒷바라지 한 이은숙 여사도 보였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부인이자 의열단으로 활동한 박차정 여사도 포함돼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돌아온 이름들-여성독립운동가 266명’의 특별전시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앞으로 ‘돌아올’ 이름으로 역사의 재조명을 기다리고 있다.

 

풀 한 포기, 땅 한줌도 내 땅에 나는 것은 소중하다며 이 땅의 독립을 부르짖던 애국열사들, 그들은 이곳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으며 스러져갔다. 하지만 그 정신은 오랫동안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교육될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빠져나올 즈음 때마침 한 어린이가 가슴팍에 태극기를 넓게 펼친 채 애국가를 열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쑥쓰러운 듯 애국가 1절을 끝마치고 이내 엄마 품에 안기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