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역사
“우린 아직 해방되지 못했다”
[광복 70주년] 軍위안부 할머니들의 恨…‘시간이 없다’
  • 정찬대 기자
  • 15.08.1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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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지났다. 하지만 광복 70주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대한민국 곳곳은 일제의 잔재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36년 고통의 세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축제’(엄밀히 말하면 반쪽 축제)의 날을 ‘아픔’으로 곱씹는 이도 적지 않다. ‘뒤틀린’ 역사관을 지닌 인사들이 버젓이 우리사회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고, 국토는 물론 정신까지 말살시킨 일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극우 망언을 퍼붓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편집자 주>

 

△김복동 할머니의 ‘끌려가는 날’ 그림(출처=일본군위안부피해자e역사관)

 

지난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유년 할머니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광복 70주년을 일주일 앞둔 비보에 ‘나눔의 집’(위안부 할머니 쉼터)은 또 한 번 눈물을 쏟아냈다. 올해만 벌써 여덟 번째다. 수많은 위안부 여성 가운데 용기 내 신고한 할머니는 238명, 이 가운데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분은 47명에 불과하다. 생존자들의 평균 나이도 어느덧 아흔에 다다랐다. 일본의 반성을 기다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다.

 

이에 앞선 6월 김외한(81) 할머니도 한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김달선(91) 할머니도 같은 날 눈을 감았다. 김외한 할머니는 정부등록 위안부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인 11살에 일본 훗카이도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해 유린당했다.

 

김달선 할머니는 19살이던 1943년 어머니를 따라 포항 흥해시장에서 청어를 팔다가 일본 순경에게 끌려가 미얀마로 향하는 배를 타야했다. 미얀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참기자로 활용했던 곳이다. 해방 후 어렵게 고국 땅을 밟은 김달선 할머니는 부산에 머물다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오빠와 남동생을 잃었다. 굴곡진 한국사의 격랑 한가운데서 이렇듯 파고에 휩쓸렸던 삶이다.

 

꽃 같던 소녀, 일본군에 ‘능욕’ 당하다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둬야 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경험을 첫 공개 증언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김 할머니는 1991년 8월14일 국내 피해자 가운데 처음으로 자신의 위안부 피해 경험을 세상에 알렸다.

 

“(위안부 강제 동원을 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의 거짓발표가)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는 것 보고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이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故김학순 할머니 기자회견 중)

 

이후 뒤늦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이 잇따라 관련 사실을 공개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아시아연대회의는 지난 2012년 김 할머니가 최초로 증언한 8월14일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중국, 대만, 필리핀 등 총 7개국으로 보내졌다. 꽃 같던 소녀들은 그렇게 이역만리에서 매일 40~50명의 군인들을 상대하며 능욕 당했다. 관계를 거부한 여성의 팔에 강제로 아편을 찔러 넣는가하면(故정서운 할머니 증언), 임신한 여성은 폭행해 유산시키거나 총살하기도 했다.(김복득 할머니 증언) 패전 후 증거인멸을 위해 집단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마지막 생존자 47명, 평균연령 89.1세

 

수백, 수천 명의 피해자들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故김학순 할머니는 생전 인터뷰에서 “(공개 전) 언니와 의논하니 조카들도 있으니 제발 하지 말라고 했다”며 “(공개 뒤) 나에게 발을 끊었다. 조카들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신고하고 난 후 더욱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들이 받았을 냉대를 짐작케 한다.

 

많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해방 후 ‘더럽혀졌다’는 죄책감에 쉽사리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외에 그대로 잔류하는가 하면 어렵게 고국 땅을 밟아도 타지에 정착하기 일쑤였다. 혹 고향에 돌아와도 철저하게 입을 닫았다.

 

하지만 김 할머니와 같은 분들이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둘 ‘용기’를 냈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증언자)는 238명. 일본의 공식 사죄를 요구하며 분연히 맞섰던 할머니 가운데 이제 역사의 증인은 단 47명만이 남았다. 이마저도 대부분이 고령자다. 평균연령 89.1세, 90세 이상 초고령자만 19명에 달한다. 85~89세 사이 고령자도 25명이나 된다. 2013년과 2014년 총 6명이던 사망자는 올해만 벌써 8명이 생을 마감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1992년 1월18일 이래 매주 열리는 ‘수요집회’도 현재 길원옥(88), 김복동(90) 할머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일본을 상대로 이들의 유일한 무기인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 모습.(출처=인터넷커뮤니티)

 

푸대접 받는 ‘소녀상’…갈길 먼 ‘역사의식’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0) 할머니는 ‘소녀상’의 팔을 지긋이 잡았다. 온갖 풍파를 겪은 자신의 앳된 모습을 쓸어안듯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13일 오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 광장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끝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사죄를 거부하고 있어 속이 상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평화의 소녀상은 1000회(20년)를 맞이한 수요집회를 기념하기 위해 2011년 12월14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건립된 소녀상은 이후 광주와 군산, 대구와 남해, 강원 원주 등 전국 곳곳에 설치되고 있다. 허나 제막식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달 중 부산시민공원에 건립 예정이던 소녀상은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산시가 이를 거부했다. 당초 약속한 예산지원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창원의 경우 ‘문화의 광장’ 인근에 세워질 계획이던 소녀상은 주변 상인과 건물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창고에 방치됐다. 급기야 경기도 화성시는 푸대접 받고 있는 창원시의 소녀상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충북 청주에서도 ‘차 없는 거리’에 소녀상을 설치하고자 했지만 시가 도로법상 문제가 있다며 반대했고, 인근 청소년광장에 건립하려던 계획 역시 관련 단체들이 ‘청소년 행사’에 방해된다며 거부했다. 논란이 일자 청주시 측은 8·15광복절 당일 청소년광장에 전시회 형식으로 소녀상을 진열토록 했다. 하지만 한시적일 뿐이다. 사회적 냉대 속에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소녀상은 할머니들의 삶과 무척이나 닮은듯해 보여 더욱더 씁쓸함을 안긴다.

 

‘뻔뻔한’ 아베 “위안부는 인신매매 희생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과할 게 없다’는 식의 태도다. 더욱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위안부 강제동원을 되레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까지 표현했다. 여기에 ‘일본회의’는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대동아전쟁은 자위(自衛·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며 과거 침략사실을 부정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일본회의는 아베 내각의 각료 20명 중 15명이 소속된 일본 내 유력 우익단체다.

 

일본의 한 극우인사는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가하는가하면, 다리가 없는 소녀상을 경기 광주 소재 나눔의 집에 보내기도 했다. 해당 소포에는 ‘제5종 보급품’이라는 글귀가 또렷했다. 5종 보급품은 군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모든 배상이 끝났다’며 피해자 측 요구를 묵살해왔다. 2004년 공개된 한일협정 예비회담 회의록을 보면 ‘개인적으로 보상하겠다’고 제안한 일본에 대해 한국 정부는 ‘내부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피해자에게 돌아 가야할 6억 달러의 보상금은 ‘경제부흥’이란 이유로 박정희 정권에 고스란히 유입됐고,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보상청구권은 철저히 거부됐다.

 

△지난 12일(수)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세계연대집회 및 제119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 행사 모습.(출처=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부의 ‘무관심’, 그리고 ‘숭일망언’

 

박근혜 대통령은 그간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과거사 해결을 내세웠다. 위안부 문제는 그중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선결 과제였다. 하지만 최근 박 대통령의 입장은 “과거사 짐을 내려놓자”고 할 만큼 유연해졌다. 유흥수 주일대사도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가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가 아니다”고 보조를 맞췄다.

 

박 대통령의 동생 근령씨는 일본의 한 인터넷방송에서 국민 정서를 자극하는 ‘숭일(崇日)망언’으로 공분을 일으켰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탓만 하고 있다’ ‘자꾸만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라는 건 창피한 일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참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망언을 쏟아냈다. 더욱이 근령씨는 ‘지위 상 언니가 하지 못한 말을 내가 대신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박 대통령은 동생 발언에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동의’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국민 여론은 박 대통령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위안부 생활은 가장 말하기 힘든 과거다. 동시에 가장 풀고 싶은 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도, 우리 정부도 문제해결을 위한 의지가 없어 보인다. 지난 13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옥선(87)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 쉼터 ‘나눔의 집’을 찾았다. 쉼터 앞마당에 세워진 김외한 할머니의 추모비를 힘없이 쓰다듬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의 진정어린 사죄를 바라며 외로운 삶을 지탱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 정부는 어떤 희망도, 위안도 주지 못했다.

 

커버지리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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