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생활
아나키스트의 고향 밀양에서 약산을 만나다
[답사기] 민중 저항의 역사, 그리고 부역의 추억
  • 정찬대 기자
  • 16.11.2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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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은 화롯불 같다. 소박하지만 오랫동안 진중한 열기를 유지한다. 민중에, 불의에, 투쟁에 열망하는 밀양은 그래서 여전히 뜨겁다.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를 거쳐 산업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는 밀양 구석구석을 비춘다. 송전탑 투쟁이 그랬고, 신영복 선생이 그랬으며, 약산 김원봉 장군과 그의 부인 박차정 의사가 그랬다. 그런 점에서 밀양은 민중 투쟁의 근현대사를 온전히 꿰뚫고 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강연을 하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아침부터 부산했다. 백팩과 카메라 한 대를 들쳐 메고 출발지인 양재역(서울 서초구)으로 향했다. 7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지만 집결지엔 이미 몇몇이 자리한 채 일행을 마주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눈 뒤 승차했다. 설렘보다는 긴장이, 들뜸보다는 무거움이 앞섰다. 마음 편하자고 계획한 여행은 아니었다. 느슨해진 방향타에 긴장을 불어넣고자 마련한 답사(11월4일~5일, 성공회대민주자료관 주관·의열단약산김원봉기념사회업 후원)였다. 그래서일까. 서울을 빠져나와 4시간 넘는 시간을 내달렸지만 마냥 피곤함에 뉠 순 없었다.(여기에는 한홍구 교수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강연도 한몫했다)

 

신영복과 송전탑 투쟁은 닮아있다

 

월악산과 소백산 사이를 비집고 나온 차량은 문경새재를 넘어 곧장 경남 밀양으로 향했다. 늦가을 햇살이 눈부신 차창 밖은 황금빛 들녘이 풍요롭다. 금빛 모래톱과 하찮은 들풀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멋을 뽐내는 소소함이 마냥 정겹다.

 

첫 일정은 쇠귀 신영복 선생이 잠든 곳에서 시작됐다. 선생이 20년 징역살이와 7년간의 칩거 끝에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고향 밀양이다. 그의 육신과 새 삶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이끈 근원이 바로 이곳 밀양인 셈이다.

 

시대의 지성이자 살아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선생은 독재의 광기가 한 인간을 얼마나 파멸로 몰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그럼에도 ‘한 평 감옥’에서 ‘더불어 숲’을 본 선생은 함께하는 정신이야말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내면의 평화 속에서 가열 차게 항거해온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시대의 지성’이자 ‘살아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故신윤복 선생은 함께하는 정신이야말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커버리지(정찬대)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은 어느새 하나의 순례지가 됐다. 공권력의 패악질로 인간의 존엄성이 철거된 곳, 그러면서도 인간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동시에 일깨워주는 공간이다. 땅을 일구며 터를 지켜온 어르신들은 목에 쇠줄을 건 채 힘겹게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날카로운 절단기로 서로를 엮어놓은 쇠줄을 끊고 이들을 잡아챘고, 할매와 할배들은 개 끌리듯 끌려나왔다.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후 평밭마을(부북면 위양리)을 감싸고 있는 화악산 등허리에는 765kV 송전선이 건설됐고, 故이치우 어르신(74)이 분신한 보라마을(산외면 희곡리)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송전탑이 들어섰다. 찬성과 반대가 뒤섞인 마을은 그렇게 ‘쪼가리’ 났고, 후유증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김수환 밀양경찰서장은 청와대 경호대장으로 영전했다. 또 총괄 책임자였던 이철성 경남경찰청장은 대한민국 경찰청 수장인 경찰청장에 내정됐다. 이를 두고 한 주민은 ‘부역의 대가’라며 공분했다.

 

“이기 내 땅이 아닌기라, 살아생전 관리만 해주는거재. 그래가 끝까지 도장을 안 찍었다아이가, 도저히 그래는 못하는기라. 그리했뿌먼 자식들은 우야라꼬? 양심이 그라마 안 되는기라”

 

팔순 어르신들이 그렇게까지 반대한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처절하게 절규했는지 직접 얘기를 듣고 싶었다. 허나 평밭마을 이남호 어르신의 대답은 지극히 단순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모두가 잊고 지냈던 가치를 어르신들은 일깨우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세속적인 탓일 수도 있다. 순간 한없이 부끄러웠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의 최일선 섰던 이들의 모습. 사진 좌측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어르신들이 직접 만들어 놓은 하우스이며, 사진 우측 끝은 현재 가동되고 있는 밀양 송전탑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합니다. 사상이 애정으로 성숙하기까지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여정이 남아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이며, 현장이며, 숲입니다”(故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 중에서)

 

송전탑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실천이며 현장이다. 또한 가슴 아리는 상처이자 절규이며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다. 송전탑 투쟁과 신영복 선생은 그래서 닮아있다. 한없이 약해보이지만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

 

평밭마을의 아침, 그리고 항일투쟁의 역사

 

송전탑 반대 투쟁 주민들과 저녁을 함께한 뒤 평밭마을 한 고택에 여장을 풀었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노루잠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입동을 앞둔 알싸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이른 새벽 정신을 깨웠다. 잠자리를 정돈한 뒤 마을을 둘러봤다. 화악산에 가로막힌 짙은 안개가 평밭마을의 괴괴함을 더했다. 산허리 철탑에는 항공장애 표시등이 붉은 빛을 띠며 연신 마을을 노려봤다. 이를 두고 전날 한 주민은 “괴물 눈 같다”고 했고, 또 다른 주민은 “악마가 노려보는 듯 소름끼치다”고도 했다.

 

높다란 토담 따라 길게 이어진 골목을 지나오면 겹겹이 쌓인 처마가 한 눈에 펼쳐진다. 마치 한 무리의 고택이 얽히고설킨 듯 풍광이 이채롭다. 토담 위 이끼 낀 기와가 열 맞춰 누워있고, 그 위로 발그레한 홍시가 부끄러운 듯 빠끔히 내려 본다. 그 와중에 송전탑에서 들려오는 ‘웅’ 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여주 이씨 집성촌인 평밭마을은 밀양 퇴로리 이씨 고가, 이병수 가옥(영화 ‘오구’ 촬영지)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옥 등이 마을의 운치를 더한다. ⓒ커버리지(정찬대)

 

평밭마을은 전통 가옥과 송전탑만 유명한 게 아니다. 밀양이 갖고 있는 항거의 역사가 말해주듯 곳곳이 항일 투쟁의 숨결이 녹아 있다. 독립운동가 이상관 선생(1890~1936)도 이곳 출신이다. 마을 입구 실개천 옆으로 선생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1931년 조선혁명군(총사령관 양세봉) 재정부장에 임명돼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으는 일에 전념한 그는 1936년 체포돼 일본 헌병대에 압송된 뒤 중국 봉천 북대영에서 피살됐다.

 

일제강점기 아나키즘의 본산으로 통할 만큼 밀양은 다양한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를 비롯해 김대지 고인덕 김병환 황상규 윤치형 전홍표 최수봉 등 걸출한 항일지사들이 모두 밀양 출신이다.

 

아침 논단의 강사로 나선 최필숙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사무국장(현 밀양전자고 역사교사)은 “밀양에서만 69명의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았다”고 했다. 이 가운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한 분만 10명”이란다.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명단에는 우당 이회영, 저항시인 윤동주, 3·1운동의 유관순 등 모두 809명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산(1898~1958)과 석정(1901~1942)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네 형·동생 하던 사이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태항산 십자령 전투에서 사망한 석정이 평생 가장 가까운 동지로 지냈던 이도 약산이다. ‘의열단 13인’ 중 한명인 윤세주는 저항시인 이육사를 독립투사로 이끈 선배이자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쫓긴 중국 팔로군의 퇴로를 열어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일명 태항산 ‘반소탕전’, 바로 십자령 전투다. 이 퇴로길에 등소평, 팽덕회, 주덕, 그리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이 있었다.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 또는 ‘혈맹’이라고 지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확히 70년 후 일본 관동군 소위 박정희와 이에 맞섰던 중국공산당 시중쉰의 후손은 양국 정상으로 마주했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기념관 내에 걸려있는 의열단 단체사진,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깃발, 이상관 선생 기적비,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사무국장. ⓒ커버리지(정찬대)

 

의열단장 김원봉과 박차정 의사

 

‘밀양 사람’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곽재기) 이종암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동지들과 함께 중국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발족했다. 창립멤버 13명 중 5명이 밀양 출신이다.

 

무장 항일투쟁을 이끈 의열단은 일제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약산 목에 걸린 현상금만 무려 100만원(현재 금액 약 320억원). 일본제국 역대 최고액이다. 당시 백범 김구의 현상금이 60만원(현재 금액 192억원)이었으니 백범 입장에서 보면 약산을 시기할 법도 하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말이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벽면에도 이 경구가 새겨져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한계와 가능성을 경험한 약산은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상하이 황포탄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이 모두 의열단에서 계획한 무장 항일투쟁이다.

 

기념관 내부에는 1919년 3·13밀양만세운동(영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 1920년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38년 조선의용대 창건기념 기록 등이 비교적 잘 정리돼 있다. 약산과 의열단에 대한 갖가지 자료와 기록도 자료관 한 켠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교롭게도 2008년 개관한 기념관 부지는 일본 중의원을 지낸 밀양 출신 친일파 박춘금(1891~1973)의 후손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부역의 대가로 얻은 친일 재산일터인데, 이를 매입해 기념관을 세웠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하다.

 

△약산 김원봉 생가지에 꾸며진 항일 테마거리의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의열단의 산실 밀양시내로 들어왔다. 알록달록 차광막을 길게 늘어뜨린 밀양상설시장 내에 들어서면 옛 밀양경찰서 터가 나온다. 1920년 12월27일 최수봉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던 장소다. 당시 24살이던 그는 현장에서 붙잡혀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꾸불꾸불 미로 같은 시장을 빠져나오면 내일·내이동 일원을 가로지르는 해천(垓川)과 마주한다. 좁다란 터널 끝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듯 바람이 시원하다. 타임머신의 바늘은 순간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 13살이던 약산과 10살이던 석정은 아마도 이곳에서 물장구를 쳤을 게다. 돌멩이로 물막이를 한 채 피라미를 잡고, 입술이 파래지도록 무자맥질을 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 될 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물론 약산은 1911년 일본 천황 생일에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려 퇴학을 당할 만큼 항일정신이 남달랐다)

 

해천 바로 옆 약산의 생가지가 있고,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석정의 집터가 있다. 천변은 항일 테마거리가 조성돼 많은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지만, 정작 생가지에는 작은 표지석만 세워진 채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아마도 온전한 복원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답사팀의 발길은 부북면 제대리로 향했다. 이곳에 약산의 부인 박차정(1910~1944) 의사가 외로이 묻혀있다. 약산 생가를 바라보고 있는 두 평 남짓한 봉분은 벌거숭이 된 채 메말라있고, 작은 태극기와 조화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 열여섯 자 비문은 이곳에 묻힌 묘의 주인을 말해준다. 박 의사가 졸업한 부산 동래여자고등학교 후배들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치는 않다.

 

박 의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성 항일운동가다. 부산 출신인 그는 1930년 근우회 활동으로 구속돼 풀려난 뒤 의열단 단원이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권유에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듬해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한 박 의사는 1932년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과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1945년 해방 후 약산은 박 의사의 유골을 안고 귀국, 이곳 밀양에 안장했다.

 

△사진 좌측 상단은 박차정 의사 장례식 모습. 약산(중앙)이 해방 후 유골을 가져와 경남 밀양에 안장했다. 우측은 현재 박 의사 묘소. 조화와 작은 태극기만이 벌거숭이 된 봉분을 지키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산이 되고자 했던 그, 南-北이 버리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이 찾아왔건만 민중의 삶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일 부역자는 권력을 향유했고, 이승만 독재정권은 이념을 덧씌워 정적 제거에 나섰다. 반이승만 편에 섰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란 특수성까지 더해지면서 학살은 더욱 과감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약산이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한 것은 1947년 3월의 일이다. 남로당 파업 연류 의혹과 관련, 공산주의자인 것을 시인하라며 치도곤을 당한 것이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 선생(1900∼1987)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김원봉은 사흘을 꼬박 울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자신과 가까운 몽양 여운형 선생까지 그해 7월 암살되면서 신변을 위협을 느낀 약산은 이듬해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북으로 건너간 뒤 잔류, 월북인사가 됐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국민보도연맹으로 학살됐고, 부친 또한 유폐된 뒤 굶어죽는 참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1932년생) 할머니도 경찰에 불려가 숱한 고문을 당했다. 김 할머니는 약산의 유일한 생존 혈육으로 현재 밀양에 거주 중이다.

 

△남천강(밀양강)을 바라보고 있는 밀양 영남루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약산은 1958년 김일성 독재체제에 반대해 결국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용돼 버림받은 그는 그렇게 비운의 사나이가 됐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고, 또한 너무나 가혹한 죄를 졌다.

 

영남루에 올라 굽어 흐르는 남천강(밀양강)을 내려 보니 산이 되고자 했던 그 사람의 조영이 무봉산 자락의 그림자가 되어 푸른 빛깔 강물에 드리운다. 사방을 압도하는 웅장한 풍모의 영남루가 어쩐지 외로워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본 기사는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에 함께 게재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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