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생활
[스포츠톡] 스포츠정신과 불문율
타인을 재단하는 관념화된 예의 기준
  • 송종민 시민기자
  • 15.05.2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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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여러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만나게 된다. 공적인 관계와 사적인 관계가 있고, 이 두 가지 경계가 모호한 형태의 관계 또한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최근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그와 결혼할 여자를 소개받게 됐다. 형식적인 인사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소소한 질문을 몇 개 던지며 어서 이 자리가 끝나기를 고대하던 중 그녀가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휴대폰 게임에 심취할만한 미숙한 아동도 아니었을 텐데, 그녀는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그런 광경이 몹시 낯설고 당혹스러우며 또한 불쾌했다.

 

예를 갖추고 대화하는 자리에서 휴대폰만 부여잡고 있는 건 상식이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비춰졌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허나 그 자리에서 불쾌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구태여 초면에 얼굴 붉히는 것 또한 그리 어른스런 표출방식은 아니라고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미묘한 딜레마가 발생했다. 상식과 예의의 기준은 무엇일까? 같은 국가공동체에서 비슷한 교육과정을 겪었는데, 서로에 대한 배려의 선은 왜 이리 제각각일까? 명확히 합의되지 않은 예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려하니 더더욱 그날의 자리가 부대꼈다.

 

스포츠에서 불문율이 중요한 이유

 

모든 것엔 규칙이 있다. 그것이 명확히 문자로 표현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추면 성문법이 되고, 그렇지 않고 관습이나 판례 따위의 도움을 받게 되면 불문법이 된다. 그리고 이같은 규칙의 명확성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분야가 스포츠일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을 합리적인 이유로 용인하고, 패자에게도 땀의 대가와 격려를 보내기 위해선 규칙의 상세화나 규격화는 필수다. 그러나 이 모든 규칙이 영구불변할 수도 없고, 모든 변수를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포용할 수도 없다.

 

높아진 대중의 시선은 급속한 기계화와 미디어의 발달로 보다 정밀한 ‘판독’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간의 ‘판단’보다 우선시됐다. 그리고 과거보다 월등해진 신체조건과 기술의 진보는 좀 더 정밀한 규칙의 정립을 요구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변수들을 성문규칙이 탄력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불문규칙을 보조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고, 이를 스포츠 분야에 접목한 것을 흔히 ‘스포츠 불문율’이라고 통칭한다.

 

지난 23일 프로야구 한화-KT전에서 야구팬이라면 익숙한 유형의 불문율 논란이 발생했다. 상황은 이랬다. 6-1로 앞선 9회 초 1사 1루에서 한화 강경학이 도루를 했다. 이어 한화 벤치는 9회 말 수비에서 줄줄이 투수를 교체하며 한 타자씩을 상대하게 했다.

 

이 부분에서 적용되는 불문율은 두 가지다. 승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기고 있는 팀에서 도루를 하지 않는다’와 역시 같은 맥락에서 ‘불필요한 투수교체로 지고 있는 팀을 자극하지 않는다’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학원에서부터 사회인 야구까지 모두에게 큰 틀에서 적용되는 대표적인 불문율이다. 그러면 과연 한화는 불문율을 어긴 것으로 봐야할까?

 

논의를 조금만 확장해보자. 대표적인 구기종목인 축구와 농구에도 나름의 불문율이 있다. 축구는 이기고 있는 팀의 선수가 묘기 같은 드리블로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농락해선 안 되고, 농구는 이기고 있는 팀의 벤치에서 특별한 사유 없이 작전타임을 신청해선 안 된다.

 

즉, 스포츠 업계에서의 불문율이란 이미 승패가 결정 난 상황에서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조롱할 목적의 행위들은 모두 자제의 대상이 되고, 이를 어겼을 시 즉각적인 보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스포츠맨십과 불문율 사이…인과관계 고려해야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규칙은 불변의 것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성문화된 규칙이야 여러 프로세스를 통해 논의와 개정이 공개될 테니-국내 모든 협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여기에선 불문율에 집중해 보자.

 

승패가 거의 결정 난 시점을 대체 어느 지점으로 봐야하는 걸까. 경기 종반의 기준은 무엇이고, 지고 있는 팀이 현저하게 역전할 수 없는 점수 차는 얼마인 걸까. 혹, 이기고 있는 팀이 알량한 매너모드를 발동해 역전패했을 경우를 가정해 보자. 접전상황에서의 패배와는 질적으로 다른 후유증과 상실감이 덮치진 않을까?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는 명제는 당연유효하다. 허나 행위의 인과관계를 면밀히 따져보지 않고, 지고 있는 쪽에서 감정이 상했다고 해서 불문율을 어긴 비매너 행태로 무조건 몰아가는 것도 맹목적인 대중재판은 아닐까? 약자를 배려하는 것 못지않게 승부에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페어플레이 정신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2015년 현재의 프로야구는 극단적인 ‘타고투저’(타력은 좋은데, 투수력이 나쁜 상태) 시대다. 정확히는 지난해부터 괴이할 정도의 타격과 투수력의 불균형이 심화된 시즌의 연속이다.

 

먼저 투수를 살펴보자. 팀의 타격지원을 받는 경우 단순 승수는 그 투수의 자질을 판단하는데 적합지 않으므로 여기에선 평균자책으로 비교해보자. 지난 시준 평균자책점 1위는 삼성라이온즈의 용병투수 벤덴헐크로 그 수치는 3.18이었다. 30년이 넘은 프로야구 역사에서 평균자책점 1위의 수치가 3점대를 상회한 적은 2003년도 현대유니콘스 용병투수 타워스의 사례 한번뿐이었다. 그때도 수치는 3.01로 겨우 3.0을 상회했다.

 

지난 시즌의 경우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전체 투수들의 평균자책점이 5점대(5.21)를 훌쩍 넘었다. 경기 종반의 불문율을 논하고 있으니, 선발투수보다 마무리 투수로 눈을 돌려 보자. 2014시즌 32세이브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한 손승락(넥센) 선수의 경우 평균자책점이 4.33이고, 2위인 임창용(삼성라이온스) 선수는 무려 5.84에 달했다.

 

이닝이 적은 계투 유형의 수준급 투수가 선발투수보다 평균자책점이 낮아야 함을 감안한다면 투수력의 질적 하락은 더욱더 확연해 보인다.

 

반면, 지난 시즌 3할을 넘긴 타자만 무려 38명이다. 서건창(넥센) 선수는 최다안타 신기록을 작성했고, 같은 팀 박병호 선수는 1999년과 2003년의 이승엽(삼성라이온스)과 2003년의 심정수(전 삼성라이온스) 선수에 이어 역대 3번째로 50홈런 이상(52)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을 필두로 시작된 비정상적인 타고투저를 감안하면 경기종반의 ‘이미 승패가 결정 난 시점’에 대한 과거의 불문율은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야구의 특수성,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구의 경우 축구나 농구와는 다른 면에서 불문율을 논해야 한다. 야구에 타임아웃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축구는 전·후반 90분간 심판 재량의 인저리 타임으로 2시간여의 경기시간이 있고, 농구 역시 KBL기준으로 한 쿼터 당 10분씩, 모든 요소를 감안해도 1시간30분가량의 경기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야구는 시간의 제한이 없는 종목이다.

 

메이저리그와 달리 12회까지 승부가 결정 나지 않을 경우 무승부로 하긴 하나, 그것을 감안해도 저녁에 시작해 기본으로 3기간을 훌쩍 넘긴다. 더욱이 경기양상에 따라선 기약이 없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언제 경기가 끝날지 가늠이 힘든 게 야구란 종목의 장점이자, 단점인 셈이다.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는 팀 입장에선 무엇보다 악몽 같은 그날의 경기가 빨리 끝나길 바랄 것이다. 이기고 있는 팀에서 개인기록을 쌓기 위해 도루를 감행한다거나, 무의미해보일 수 있는 투수교체를 단행함으로써 조롱받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며, 지고 있다는 패배감이 경기의 루즈함에 배가돼 모멸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그런 기준과 시점을 이전과 다르게 해석해야 할 때라고 보여 진다. 더 이상 9회의 5점차는 현저하게 뒤집을 수 없는 점수 차라고 보기 어렵고, 투수교체 또한 상대 벤치의 고유권한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자기 팀 투수들을 테스트해볼 소중한 기회를 상대팀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 제제해야 한다? 아예 상대 벤치에 의사를 묻고, 행하는 편이 더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다. 경기가 루즈해진다는 지적이나 반론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부분의 문제제기는 적어도 팬의 몫으로 남겨놔야 할 것이다.

 

입장료를 내고 구장에 찾아오는 팬이 경기의 루즈함과 질적 하락을 지적하며, 비매너를 언급한다면 생산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지고 있는 팀이 자신들의 감정을 운운하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지금의 극단적 타고투저 시대를 고려하지 않는 ‘약자 코스프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란 말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의 말 또한 야구인들이 타 종목과의 비교우위를 내세울 때 자랑스레 전가의 보도마냥 내놓는 말이다.

 

허나 이 같은 문장을 야구의 진정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하려면 야구인들 스스로가 끝까지 승부에 최선을 다하되, 지고 있는 상대를 배려하는 균형감각을 내면화하는 훈련부터 선행돼야 할 것이다.

 

경기가 대충 기울었으니 적당히 매조지하는 게 동업자정신이라면 모든 경기를 TV와 인터넷 중계로 볼 수 있음에도 입장료를 구매해 경기장을 찾는 관중들이 지켜봐야할 무성의한 플레이는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걸까.

 

상식과 예의, 배려의 기준은 어쩌면 절대분별의 기준을 갖기 어려울지 모른다. 상대방을 존중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부분은 절대가치이겠지만, 그 방식과 표현방식은 해당 분야와 시대상황, 인과관계를 종합해 판단해야만 한다.

 

자신의 주관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그 선에 부합하지 않는다 해서 상대방을 비판하려 한다면 보다 신중하고 정교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나라 제1의 인기스포츠 종목에서 발생한 떠들썩한 논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초면의 사람 앞에서 양해 없이 휴대폰을 쥐고 있는 건 예의 있는 행동일까? 내게 관념화된 불문율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고민 해봐야겠다. 그날의 불쾌했던 감정의 잔존물은 여전하지만, 내 감정이 온전하게 정당성을 가져도 되는지 주위에 물어볼 정도의 여유는 아직 갖고 있다.

 

커버리지 송종민 시민기자(new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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