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두
자녀를 창의적인 아이로 키우려면?
[구병두의 교육에세이] 무조건적 자녀사랑과 선택적 자녀사랑
  • 구병두
  • 16.06.02 13:30
  • facebook twitter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
  • 글자크기
  • 글자크게
  • 글자작게
  • |
  • print
  • |
  • list
  • |
  • copy
우리 속담에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 말이 있다. 말 못하는 짐승도 자기 새끼를 귀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해 보살피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인간의 자녀 사랑법은 실로 다양하다. 여기에는 무조건적 사랑과 선택적 사랑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무조건적 사랑은 ‘해병대 스타일’의 부모관이다. ‘한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라는 기치 아래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내지는 헌신적인 사랑을 행한다. 비록 자신은 불행할지라도 자식만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자신의 인생 그 이상으로 보고 모든 삶과 인생을 자식에게 ‘올인(all in)’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 유형의 부모는 사랑을 핑계 삼아 자식 일에 일일이 간섭하려 들고, 심지어 자녀가 자신의 소유물인양 여기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아이에게 강요한다. 문제는 자녀에 대한 기대수준이 자녀 능력에 비해 높다는데 있다. 또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며 과잉 집착하는 현상도 발생한다. 자녀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을수록, 그리고 자녀에게 집착할수록 자신도 불행하고 자식도 불행해진다. 우리나라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 유형 가운데 하나다.

 

반면, 선택적 자녀사랑은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여긴다. 이 유형의 부모는 ‘나의 삶은 나의 것이고,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직접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유도한다. 부모는 옆에서 조력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 전부다. 선택은 그들의 몫인 셈이다.

 

이들은 자신이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하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다. 당연한 이치다. 부모가 불행한데 자식이 어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는 자식이 성공하는 것에 매달리지 않으며, 자신들의 행복부터 챙긴다. 자녀들이 무엇이 되기보다 어떻게 사는가에 더 중점을 두며, 이러한 부모는 자녀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우선시한다.

 

부모의 자녀사랑에 대한 두 유형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상당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무조건적 자녀사랑은 다분히 감정적인 자녀 양육방식으로써 선택적 자녀사랑보다 덜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효도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성장하며 또한 그렇게 노력한다. 그리고 형편이 허락되는 대로 효(孝)를 행한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자신이 바라던 만큼 효를 행하지 못할 경우 죄의식을 갖게 된다.

‘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들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또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는 등의 답변을 한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자식도 부모에게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효’의 근본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선택적 자녀사랑은 자녀 양육방식이 무조건적 자녀사랑에 비해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양육된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난다. 기독교 문화권 대부분의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유형이다.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는 자녀가 18세, 즉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동안 살아온 보금자리를 떠난다. 이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유에 대해 “나를 위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 부모님께 효도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신다”고 말한다.

 

자녀사랑에 대한 방법은 자녀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대체적으로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감정의 기복이 심한 부모일수록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녀를 대하는 태도와 행동은 확연히 달라진다. 이는 자녀의 성격형성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자녀를 ‘하느님의 선물’로 여긴다. 하느님이 맡겨주신 선물이기에 자녀를 더욱 소중히 양육하면서도 놓아줄 때를 안다.

 

자녀사랑과 관념에 대한 차이는 가정의 사회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보편적으로 사회학자들은 가정의 사회화를 ‘억압적 사회화’와 ‘참여적 사회화’로 구분한다. 억압적 사회화는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자식에 대한 집착(소유욕)을 보이는 부모로써 이들은 자녀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가장인 아버지의 결정이 절대적이다.

 

아울러 집안일에 대한 의사결정은 전적으로 부모들이 하고 자녀의 의사는 완전 무시당한 채 따라야만 한다. 심지어 아이의 생일날 외식의 메뉴조차도 부모가 결정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더라도 자신의 부모가 그랬듯 이를 대물림할 가능성이 높다.

 

참여적 사회화는 아이들의 의사를 선별적으로 반영한다. 따라서 ‘참여적 사회화’ 가정에서는 부모들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어렸을 때부터 몸소 익히며 자란다. 가족 구성원의 생일날 외식 메뉴를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함으로써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미래 사회는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한다. 그러한 인재양성은 무조건적 자녀사랑보다 선택적 자녀사랑의 양육방법에서 더 잘 나타난다. 창의성은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에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선택적 사랑과 가정의 참여적 사회화를 통해 아이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합리적인 사고를 내면화하게 되며, 그의 내적 성숙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쌓이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어떤 사랑법이 바람직한지 고민해봐야 할 때다.

 

구병두 교수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