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잇따른 인사참극-자기객관화의 결핍에 관하여
‘뻔뻔함’ 뒤에 자리한 ‘미학’…그럴듯한 자기합리화
  • 송종민 시민기자
  • 15.06.1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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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테스피아이의 미소년 ‘나르키소스’. 그는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샘만 들여다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란 단어의 유래가 된 나르키소스는 흔히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이곤 한다.(그림=카라바조(Le Caravage))

 

사람은 누구나 자기객관화가 되지 않는다. 부분적인 객관화는 가능할지언정 총체적이고 평균적인 객관화는 매우 힘들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완전무결한 객관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확대해석하고 쉽게 일반화하며 한번 형성된 가치관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범인들은 타인의 관점보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짙고 그 맛에 살아간다. 범인이 아닌 성인이나 현자들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지적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스스로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쉽게 ‘객관’이란 말을 남용하지만 특정한 사실관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모든 판단과 견해는 철저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객관화가 생래적으로 불가능하다고해서 이를 이루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거나 폄훼해선 안 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자연인으로서의 자기객관화를 향한 노력은 당위적으로 계속되어야한다.

 

우리의 주관이 완벽히 객관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성찰을 가능케 하고 주변을 둘러보게 하며 반성과 개선을 도모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라면 더더욱 이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해야 한다.

 

[자기객관화의 당위성] 자기성찰과 반성, 개선을 도모

 

‘무모한 도전’을 특별히 ‘무한도전’ 해야 하는 집단이 바로 위정자 집단이다. 일반 시민이야 자기객관화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오류에 수렴되므로 사회적 비용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사적 인간관계에서 애는 좀 먹을지언정 돈키호테 취급 받는다고 그 사람의 삶이 추락하지도 망가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치를 직업으로 하고 공공의 안정과 운용을 책임지는 사회지도층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직업정치인과 공공서비스를 책임지는 국가공무원은 국가권력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자격에 하자가 있거나 그 역량이 미달인 자가 적합하지 않은 위치에 서게 될 경우 그 사회적 비용은 매우 커지게 된다. 의회의 인사청문회나 공공기관의 심사와 같은 제도적 견제장치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기객관화가 더욱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스로가 자신을 성찰하고 주변을 살핀 후 본인과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경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리를 마다한다면 불필요한 혼란과 소모적 논쟁 같은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정자 집단의 후안문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어느 왕조나 정권에서건 문제가 된 인사는 많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늘 그래왔다. 적합한 인재를 찾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상식에 벗어난 인사참극은 절정에 달한 듯하다.

 

단순히 함량미달의 차원을 넘어 애초에 그 자리 근처에도 가면 안 되는 인사들이 버젓이 등장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하겠다며 일성을 뽐냈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본인이 부패의 공동정범이 되어 수사를 받고 있고, 후임으로 내정된 황교안 후보자 또한 이전에 낙마한 안대희 전 대법관과 비교할 때 오히려 문제가 될 사유가 많은 사람이다.

 

전관예우로 낙마한 안대희 전 대법관보다 더한 대접을 받으며 짭짤한 수익을 올렸고, 병역면제 의혹에 각종 사면 사건과 세금체납, 통합진보당 해산사태에서 보인 민주주의에 대한 현격한 소양 부족까지…. 법무부장관 청문회를 통과한 사실이 신기할 정도의 위인이다.

 

자리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사라진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 같은 경우는 논외로 치자. 대통령과 가깝단 이유만으로 팔순에 다다른 고령의 나이에 본인과 아무 직업연관성이 없는 감사직을 날름 받은 전 방송인이 있는가하면, 본인의 열정을 바쳐 독재와 싸우다 자기 밥그릇이 없어지자 독재의 잔가지가 늘어뜨린 썩은 동아줄을 덥석 부여잡은 원로정치인과 재야 시인도 있다.

 

적폐청산을 외치지만 본인이 그 적폐의 중심에 있음을 모르는 지금의 대통령 하에 너무 과도한 기대일수도 있겠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냉정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댔던 적이 있을까? 자기성찰과 반성의 프로세스를 거치고도 저리 위풍당당하게 감투를 뒤집어 쓸 수 있을까? 누구보다 자기객관화가 선행되어야 할 위정자들이 그 어느 집단보다도 지저분한 자기합리화로 분칠한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게 된다.

 

[이성과 직관 사이] 삶 깊숙이 자리한 ‘뻔뻔함의 미학’

 

우리의 이성은 ‘너 자신을 알라’고 무겁게 훈육하지만, ‘뻔뻔해야 성공한다’고 얄궂게 속삭이는 직관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직관은 단시간에 걸쳐 생성된 것이 아닌 수세기에 걸친 인류의 보편적 학습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뻔뻔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우리네 이성과 직관 개념은 역전되어지고, 이성은 태도를 바꿔 보다 뻔뻔해질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내 안의 직관적 양심은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하는 부대낌을 안겨준다.

 

사람은 이성보다 직관이 우선한다고 믿는다. 수세기동안 우리는 이성보다 직관에 의지한 채 생존해왔고 이성에 대한 맹목은 계몽주의의 몰락으로 그 종말을 맞았다.

 

난 부끄러워할 줄 알고 염치를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단순 도덕적 염치를 떠나서 자기객관화의 선행은 진지한 성찰과 반성, 실패에 대한 개선으로 이어진다고 믿기에 객관화가 되는 지도자가 그렇지 못한 지도자보다 역량도 뛰어날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뻔뻔해져야 살아남는다’는 교리를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한 나라는 그 국민의 수준만큼의 지도자를 갖는다는 명제가 진실이라면 우리는 몰염치와 후안무치가 주요 스펙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세상은 단순히 정권이 한두 번 교체된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뻔뻔함의 미학은 그럴듯한 명분과 합리화로 정밀하게 이데올로기화 되어 우리의 유전자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자기객관화와 뻔뻔함, 이성과 직관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있는 걸까. 어느 샌가 살아남기 위함이란 본능 하에 철판을 깔고, 가면놀이를 하며 하루를 버텨 나간다.

 

커버리지 송종민 시민기자(new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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