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칼럼] 다시, 1981년?
 
  • 권영준
  • 16.11.08 17:53
  • facebook twitter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
  • 글자크기
  • 글자크게
  • 글자작게
  • |
  • print
  • |
  • list
  • |
  • copy

<역사란 무엇인가?>(E.H.카 저, 박성수 역), 1983년판(서울: 민지사). 어떻게 아직 이 책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색 바랜 표지를 넘기니 면지에 메모가 남겨져있다. ‘1984년, 광화문 논장에서’. 대학시절 옮긴 자취방만도 여럿이고, 이후 이사 다닌 셋집도 대여섯 군데는 더 될 텐데…. 종이는 누렇게 변색됐고, 헌책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종이 위 활자는 읽기 힘들 정도로 작고 흐릿하다. 책꽂이 구석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얼마 전 본 기록 때문일 게다.

 

금강회 사건과 좌경용공 조작

 

필자가 이 책을 구입하기 3년 전, 1981년 가을. 충남 공주에선 교사의 꿈을 키우던 대학생들이 좌경용공 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사회과학 책을 읽고 토론하던 공주사대 ‘금강회’란 서클 학생들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로 연행된 이들에겐 몽둥이질과 통닭구이 등 무지막지한 고문이 가해졌다. 영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들 대학생 진우에게 고문수사관 차동영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검찰 공소장엔 “<역사란 무엇인가>란 이념서적을 탐독하고”란 혐의가 적시됐다. 81년은 전두환이 집권한 직후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대학가 서클과 젊은 교사 및 직장인들의 독서모임을 용공으로 몰았다. 이들에겐 이적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이적단체 구성 같은 혐의가 씌워졌다. 부산지역 부림 사건, 충남 금산지역 아람회 사건, 대전 한울회, 공주사대 금강회, 82년 군산 오송회, 광주 횃불회 사건. 모두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들이다.

 

검찰 소장에 이적표현물로 등장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대체 무슨 내용이 위험하고 문제였던 걸까? 책은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가 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책을 들춰봤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미래를 향한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잃은 사회는 과거에 자신들이 이룩한 진보에도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다. 당국은 이 책의 무엇이 가시 같았을까? 대학생들이 비판적 사고로 반정부 운동에 나서는 것? 역사의 진보를 믿는 것?

ⓒ<한겨레신문> 88년 9월 25일자 금강회 사건 기사

 사상의 자유 구속할 국정 역사교과서

 

국가 폭력으로 육신에 가해지는 고신은 사라졌다고 해도, 당시라면 꿈에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을 고문 피해자들의 끔찍한 기억까지 끄집어 낸 것은 이 정부가 좌편향을 바로잡겠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 탓이 클 게다.

 

군사 독재정권 시절의 국정 역사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뀐 것이 민주정부 10년을 보내고 2010년이니 겨우 7년이다. 그리고 이달 말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이 선을 보인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과 비선 실세 및 측근들의 국정 농단이 속속 까발려지고, 국정 역사교과서 또한 ‘최순실 교과서’란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백지화되어야 한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 해석과 사상의 자유를 구속할 정신적 고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한 것은 국민과 역사학자의 몫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역사에 관한 것을 정권이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정권이 역사를 막 다루겠다고 하면 정권의 입맛에 맞게 다룰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1월에 정부여당의 한일 외교문서 공개에 반대하며 기자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대통령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광화문에서 반대 피켓을 들고 있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서 질문을 던져본다. 다시, 1981년을 살 수는 없지 않는가?

 

권영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본 칼럼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에 함께 게재 됐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