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영암-②] 냉천마을에 불어 닥친 ‘광분의 집단학살’
‘살기위한 몸부림’…왜 그는 北의용군이 되었나
  • 정찬대 기자
  • 15.09.1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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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좌니 우니 우린 그런 거 모른다”

의용군 박씨의 사연…‘화학산 빨치산’이 되다

 

냉천마을에서 사달이 벌어지던 그 시각, 냉천 아랫동네인 다보와 연산부락은 갑자기 들려온 총소리에 일제히 몸을 피해 큰 피해를 면했다. 더욱이 연산부락은 경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 어귀에 보초를 세워 이들로부터 안전을 기하기도 했다.

 

연산부락에 만난 박상인(가명)씨는 “흰 깃발과 붉은 깃발을 들고 산에서 보초를 섰다”며 “경찰이 올 경우 붉은 기를 들어 주민들이 산으로 도망가도록 했고, 이들이 다시 영암으로 빠져나가면 흰 기를 들어 마을에서 농사짓도록 했다”고 회고했다. 주민들이 받았을 경찰에 의한 피해를 짐작케 한다.

 

△냉천부락을 지나 도로를 따라 곧장 내려오면 금정면 연보리 1구인 연산부락과 만난다. 연산부락 건너 편(사진 위쪽)에 다보마을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우측 하단에 있는 검은 지붕의 가옥에는 정복용씨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박씨는 또 자신이 빨치산 의용군으로 참여했다가 도망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내 나이 18살이었다. 좌(左)니 우(右)니 그런 것은 당연히 모르고, 배고픈 사람 잘 먹게 해준다는 말에 의용군에 참여했다”고 털어놨다.

 

1950년 6월25일 새벽,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남침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제외한 상당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북한군은 거침이 없었다. 이들은 겹겹이 처진 방어선을 쉽사리 무너뜨리며 무섭게 남하했다.

 

북한군이 금정면에 들어온 것은 1950년 8월경이다. 군경은 이미 영암을 빠져나가 후퇴한 뒤였다. 냉천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8월경에 처음 인민군을 봤다”고 했다. 실제로 7~8월경 영암경찰서는 이 지역 보도연맹원 수백 명을 사살한 뒤 퇴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해 가을 금정면을 통제한 빨치산들은 의용군에 참여할 지원자를 차출해갔다. 이렇게 모아진 이 지역 의용군은 위치상 전남 서부권의 중심쯤에 해당하는 전남 함평으로 이동해 집결한 뒤 다시 화순으로 옮겨졌다.

 

화순 남단의 화학산(해발614m)은 영암, 장흥, 보성 등 전남 동남부지역과 맞닿아 있고, 북단의 백아산(해발810m)은 지리산과 무등산을 연결하는 주요 요충지다. 특히, 백아산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주둔했을 만큼 반군의 본거지였다. 박씨는 당시 화학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의용군을 모집한다기에 자원해서 참여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리했다”

 

박씨의 거친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긴장한 듯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키더니 큰 소리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금정면소재지에서 연보리로 들어가는 초입. 사진 좌측 상석이 있는 묘지 부근과 도로 끝부분(검은 자동차 있는 부근) 우측에 인민재판을 위한 총살장이 마련됐다. ⓒ커버리지(정찬대)

북한군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감하며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의용군이 됐지만, 화순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곳곳에서 벌어진 게릴라전을 목격하며 죽음의 공포에 내몰렸고, 날선 칼날 위를 걷는 듯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었다. 황금빛 물줄기가 넘실대던 늦가을, 이들의 손은 적군의 핏줄기로 붉게 물들었고,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박씨는 죄악에 몸부림쳤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긴장한 표정은 이내 흥분으로 바뀌었다. 그는 “화순까지 넘어갔지만 먹을 것도 제대로 안주고, 사람 죽이는 것을 보면서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거듭 항변했다. 이어 “통일도 못할 것 같고, 고향 떠나 지내는 것도 겁이 났다”며 “그런 생각에 다보마을에서 함께 차출된 동무와 함께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다.

 

화순을 빠져나온 박씨는 군경과 빨치산부대 모두를 피해 힘겹게 이동했다. 그리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내산(금정면 청룡리)으로 왔고, 외갓집이 있던 나주로 곧장 향했다. 군경에 의한 보복 학살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고향인 연산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취재진은 박씨로부터 ‘화학산 빨치산’ 생활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듣고자 했지만, 그는 “그만하세, 그때 생각만하면 지금도 괴롭단 말이시”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그만큼 당시 기억이 그에게 상처가 됐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마주한 충격적인 공포의 잔상은 60년 세월이 더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영암 부호 정씨 집안의 특별한 인연

감시대상 1호, 몰살 위기에서 살아남다

 

연보리는 군경에 의한 피해가 컸지만, 빨치산에 의한 피해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군이나 경찰 집안이 가장 큰 피해를 봤고, 부호(富戶), 지식인들도 대부분 총살시켰다. 앞서 소개한 토벌대 척후병 조경석씨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냉천에 살던 조씨는 동생이 경찰이란 이유로 일가가 빨치산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어렵사리 동네를 빠져나간 그는 이후 군경의 토벌작전이 있을 것이란 소문을 듣고 길안내를 자처하다 변을 당했다. 현재 냉천마을에는 조씨의 며느리가 터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밖에도 냉천에 거주하던 김윤채씨 가족 역시 작은 아버지가 형사라는 이유로 윤채씨와 그의 여동생 종숙씨를 제외한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군경 토벌작전이 있기 전 연보부락에 들어온 경찰이 마을 청년들을 감금했던 장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주민들은 이곳을 ‘앵게 앞’이라고 불렀다. 현재 가옥은 모두 허물어져 밭이 됐고, 그 옆으로 비닐하우스 한 동이 놓여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연산부락에 살던 정복용(당시 32세·현재 작고)씨 사연은 좀 더 특별하다. 그의 집안은 빨치산에 의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특별한 인연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정씨는 미군정기 미군부대(목포 주둔 제16사단)에서 동시통역관을 지냈을 만큼 지역 내 엘리트였다. 전쟁 전 정씨의 아버지는 고향으로 그를 불러왔고, 빨치산이 마을을 습격한 뒤에는 자연스레 ‘감시대상 1호’가 됐다. 지방 좌익들은 인민재판을 한다며 그의 가족 모두를 포승줄에 묶어 총살장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 우연찮게 이를 본 한 유격대장이 정씨 가족 모두를 빼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영암 부호로 손꼽혔던 정씨 집안의 머슴을 지낸 한 청년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게 됐다. 물론 추수 후 받기로 되어있던 세경은 포기했다. 하지만 워낙 성실했던 그에게 정씨 아버지는 세경을 넉넉히 챙겨줬고, 훗날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해남지역 빨치산부대의 유격대장이 됐고, 빨치산의 후퇴로 영암을 지나 금정까지 오면서 총살장으로 향하던 정씨 일가와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통해 가족 모두를 빼주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정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빨치산에 이어 경찰들에게서도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해병대의 토벌작전이 있기 전 연산부락을 찾은 경찰은 동네 청년 열댓 명을 잡아다 감금시켰다. 물론, 명분은 ‘빨갱이 색출’이었다. 불안한 정씨는 잠을 청할 수 없었고, 경계가 느슨해진 새벽녘,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다음날 아침, 집에 감금된 청년들은 영부재(냉천과 연산부락 사이에 있던 고개)에 끌려가 모두 사살됐다. 정씨만이 다보마을 인근 논에 쌓아둔 볏단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남았다.

 

연산부락에서 만난 한 주민은 “낮에 경찰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다짜고짜 끌고 갔다”며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잡혀간 사람 중 안적양반(정씨의 별칭)만 살고 모두 죽었다”며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냉천마을과 연보마을 중간에 위치한 ‘6·25 희생자위령탑’. 위령탑 아래 누군가 따라놓고 간 막걸리와 잔이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의 넋을 달래는 듯하다. ⓒ커버리지(정찬대)

 

영암 보도연맹 사건

빈 트럭만 남긴 채 쓸쓸한 주검이 되다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49년 10월,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을 조직한다. 그해 말까지 이 조직에 가입된 수는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초기 보도연맹 가입자는 순수하게 좌익에서 전향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조직 확대과정에서 정부는 의무가입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말단 행정기관에까지 가입인원을 할당하면서 본인 의사와 무관한 이들이 강제 가입된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이름 석 자만 쓰면 밀가루와 고무신 등을 준다는 말에 그냥 서명한 이도 적지 않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진태(장동건역)의 약혼녀로 등장한 영신(故김은주역)이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장면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살생부 명단’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보도연맹사건이다.

 

전쟁 뒤 정부의 태도는 돌변했다. 좌익 전향자들이 행여나 인민군에 참여할 것을 우려해 후퇴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 및 즉결처분을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암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암경찰서는 이 지역 보도연맹원을 영암읍 마을회관에 감금시켰다. 이후 7월15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집단 사살했다. 1차는 10여 대 트럭에 실려 금정면 덤재 골짜기에서, 2차는 냉천마을 인근 야산에서 희생됐다. 그렇게 죽어간 이가 200~300여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주민은 “경찰이 후퇴하면서 수백 명의 보도연맹원을 죽이고 갔다”고 했다. 아울러 “냉천마을 앞 여운재 넘어 약수터 근처에서만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고 증언했다.

 

그는 “사람을 가득 태운 수십 대의 트럭이 여운재를 넘어왔다가 영암으로 빠져나갈 때는 빈 트럭으로 갔다”며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가 7~8월로 한 여름이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며 “총살한 사람을 그냥 버리고 간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른다”고 치를 떨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 (press@coverage.kr)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남 영암편>

냉천마을에 불어 닥친 ‘광분의 집단학살’

 

 

<‘전남 구례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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