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구례-②] 지리산 품은 구례의 恨…섬진강 따라 굽이치다
좌우 대립의 정점에서 ‘학살의 피’ 흘린 사람들
  • 정찬대 기자
  • 15.09.3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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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미천한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아버지를 죽음에 몰았다는 자책과 분노

 

현재 구례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박찬근(80·구례군 간전면)씨는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로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 박씨의 나이 겨우 13세. 구례 중앙초교 6학년이던 그는 작고 힘없는 그저 그런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박찬근씨의 아버지는 군경에 의해 총살당했다. 2007년에 이어 2015년에 다시 만난 박씨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그의 눈망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커버리지(정찬대)

 

경찰이 그의 집을 찾아온 것은 48년 11월18일 목요일 오전 11시경. 박씨는 집 근처 골목에서 친구들과 제기차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카빈총을 멘 군 헌병과 구례서 형사였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박덕서 집이 어디냐?” 동네 아저씨와 같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경찰이 물어왔다. 순간 정적이 흐른 듯 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박씨는 “우리 아버지인데요”라며 이들을 안내했다. 긴장된 순간만큼 집으로 가는 골목은 좁다랗고 길었다.

 

아버지 얘기를 하는 내내 그는 자신을 자책하고 책망하듯 허탈해했다. 그리고 잠시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경찰이 야수로 돌변한 것은 사립문에 들었을 때였다. “김창렬이 짐 어딨어!”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내 짐작 가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박씨의 집은 지리산 자락의 대구산 아래였기에 반란군들의 왕래가 잦았다.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다른 곳에 피해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박씨만이 집에 남아 생활했다.

 

경찰이 들이닥치기 며칠 전 아버지 친구 분 중 한명이 밤이면 집에 와 잠을 청하고 새벽녘이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친구가 빨치산이란 걸 알면서도 죽마고우였던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미 모든 정황을 알고 있던 군경은 집안 곳곳을 뒤졌다. 이내 보따리 세 개를 확인한 그들은 곧바로 아버지를 연행했다. 마치 수의(壽衣)를 걸치듯 하얀 두루마기를 챙겨 입은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넨 뒤 그들을 따라 나섰고, 그길로 마지막이 됐다. 박씨의 아버지는 구례경찰서에서 사살된 72명 가운데 한명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내가 너무 원망스럽고, 나이가 들수록 애석하고 죄스러워….”

 

상기된 박씨의 얼굴에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과 자책, 그리고 그날의 죄스러움이 가득했다.

 

총살 집행 후 석 달간 봉성산은 출입이 금지됐다. 그가 아버지 유해를 찾아 봉성산에 오른 것도 이듬해 3월이다. 할아버지와 마을 장정 두 명과 함께였지만 아버지를 찾을 순 없었다. 곳곳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고, 뒤엉킨 시신은 부패돼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썩은 추깃물에서 풍기는 악취를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빈손으로 내려왔다. 얼마 후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인한 이질로 돌아가셨다.

 

1948년 11월의 구례는 13살 어린아이가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내색 없었지만, 간혹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의 시선 끝에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데려온 자신의 모습도 함께 있는 것 같아 더더욱 괴로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어머니도 경찰서에 세 번이나 불려갔지만, 다행히 무혐의로 풀려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삶을 덧칠하고 있는 붉은 빛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만석꾼까지는 아니었지만, 천석꾼 정도는 됐던 집안의 가세도 날로 기울었다. 전답(田畓) 한 마지기를 팔아 일 년을 생활하고, 이듬해 또 한 마지기를 팔아가면서 연명하는 식이었다.

 

“사는 게 아니었지”

 

31살에 홀로된 어머니의 삶에 대해 박씨는 그렇게 표현했다.

 

2007년 박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90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로움이 누구보다 더할 터지만 그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취재진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그날의 기억을 듣고자 했지만, 박씨는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 때문인지 당시 얘기만 나오면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역정을 낸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는 6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어둠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유에서였을 게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구례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해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지원조치를 마련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사진은 박찬근씨가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받은 진실규명 결정 통지서. ⓒ커버리지(정찬대)

 

2015년 1월 박씨를 다시 찾은 취재진은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 박씨는 착잡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5년 전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박씨의 얼굴도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라고 물으니 최근 위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그의 눈망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참으로 한 많은 인생이었다. 박씨도 그의 어머니도….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전남 구례-③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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