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화순-③] 화순 곳곳의 상흔,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인민군 복장한 軍…대량학살 불러오다
  • 정찬대 기자
  • 15.10.2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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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40여명 집단사살…아이 울음소리에 ‘확인사살’

 

“사격…”

조금 뒤 다시 이어진 “확인사실”

 

차갑고 날카로운 중대장 목소리와 함께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쏟아져 나온 총알을 맞고 사람들은 곧바로 땅바닥에 고꾸라졌고, 수양산에 부딪혀 되돌아온 한스런 굉음은 하갈 주민의 오열과 뒤섞였다.

△수양산을 넘어온 군인들은 죄 없는 민간인을 마을 구릉으로 끌고 간 뒤 집단으로 학살했다. 사진은 주민들이 총살당한 장소. ⓒ커버리지(정찬대)

 

오후 4시경 마을을 덮친 군인들은 어둑해지는 6~7시경 총살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끝났다’고 생각한 이들은 무기를 챙겨들고 산을 내려오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앙! 아아앙” 피범벅이 된 시체더미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애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이 아직도 살아있네”라는 중대장의 말과 함께 “확인사살”이란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2차 총격이 가해졌다. 어머니 등 뒤에서 겨우 총탄을 피한 한 아이의 울음은 그제야 멈췄다.

 

△하갈마을에서 만난 최일주씨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했고, 그의 형은 총살장으로 끌려가 사살됐다. 커버리지(정찬대)

당시 죽은 아이의 신원은 정확치 않으나 최정휴(당시 61세), 최영휴(당시 58세), 최병철(당시 38세), 박귀순(당시 39세), 최영주(당시 17세), 최정애(당시 6세), 최경례(당시 1세·호적미등재) 등 일가족 7명이 몰살된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최정애, 최경례 중 한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최씨 가족이 이렇듯 변을 당한 것은 국군을 인민군으로 착각한 최정휴(할아버지)씨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숙부(최병희)와 당숙(최병호)이 몇 개월 전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군인은 이들 모두를 ‘좌익분자’로 판단했다.

 

최일주(81·대덕면 갈전리)씨도 당시 현장에서 형을 잃었다. 하갈마을에서 취재진과 만난 그는 “60세 중반이던 아버지는 군인들에 의해 논바닥에서 심한 매질을 당했고, 형님(최길주·당시 20살)은 군인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최씨는 “그때 내 나이가 16살이었는데, 내 밑으로 13살, 10살 동생과 함께 산으로 도망가 우리 세 형제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40여명의 무고한 양민들은 고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서 한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총살집행을 끝낸 군인들은 ‘한 마을을 끝냈다’는 듯한 표정을 내보이며 “출발”이란 소리와 함께 유유히 그 장소를 떠났다. 12중대는 이후 하갈을 지나 다음 장소인 서유초등학교(화순 북면 서유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전을 이어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선(死線)을 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끈적한 피비린내 속에서 신음소리가 새 나왔다. 팔과 허리에 총상을 입은 류동호씨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들 사이에서 가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서너 시간 전 보리밭을 갈던 17살 학생은 참혹한 고통과 공포, 그리고 추위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괴로군 복장을 한 군인들은 마을 앞 논으로 사람들을 끌고 온 뒤 죄 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빨갱이 부역자’를 가려냈다. 커버리지(정찬대)

 

류씨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여섯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경을 헤맨 끝에 정신을 차린 그는 나뒹구는 시체더미 속에 살아난 이가 자신 말고 누군가 또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날 총살로 40여명 가운데 7~8명이 목숨을 부지했고, 현재까지 생존한 이는 류씨가 유일하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류동호씨가 총상을 입은 자신의 팔을 내보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버리지(정찬대)

그는 “천운이었다”고 했다. 또 “하늘이 돕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살아난 류씨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갈전리에서 만난 류씨의 팔은 참혹했던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총상 자국은 깊게 패어 있었고, 힘줄이 끊겼는지 손은 불구가 돼 펴지지 않았다. 취재진의 요구에 자신을 팔을 걷어 보인 그는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애써 팔에서 눈을 뗐다.

 

류씨는 “총상을 입고 혼이 나갔다. 정신을 잃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2차 사격만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시체 속에서 어린 아기가 울더라고, 그러더니 군인들이 ‘이놈들 봐라’ 하면서 다시 확인사살을 하는 거야, 그 통에 더 죽었지”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류씨의 표정은 무척이나 힘들어보였다.

 

마을로 내려온 그는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집에서 총상을 치료했다. 그는 “아주까리(피마자) 껍질을 벗기면 하얀 알맹이가 나오는데, 그것을 숯검정, 송진과 함께 버무려 고약을 만들어 상처에 발랐다”고 했다. 그리고 “팔에서 구더기를 직접 뺐다”는 말도 했다. 몇 개월간 그렇게 민간요법으로 치료한 끝에 상처가 아물었고, 지금의 팔을 얻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전남 화순 ④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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