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함평-⑥] 불갑산 꽃무릇에 배인 선불(仙佛)의 절규
5중대의 인간사냥, 그리고 마지막 살육 ‘대보름작전’
  • 정찬대 기자
  • 15.12.1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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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미천한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보도연맹’ 노기현씨 흉탄 맞고 살아나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 전 좌익에 가담한 이들에 대한 검속과 즉결처분을 통해 좌익을 뿌리 채 뽑고자 했다. 특히, 전쟁 중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죄 없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보도연맹사건이다. 전국적으로 최대 30만에서 최소 10만의 맹원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함평 신광면 계천리 노기현(86세)씨도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로 구금된 뒤 경찰에 의해 즉결처분됐다. 하지만 그는 흉탄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한국전쟁 당시 함평경찰서는 보도연맹원을 갑, 을, 병으로 분류해 사살했으며, 당시 병종으로 분류된 신광면 노기현씨는 나산면 넙태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는 관통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7월11일 신광지서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고 파출소로 향했다. 경찰은 ‘임시 수용하려는 것이니 순순히 응하라’며 안심시켰다. 전쟁 전 숙부가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경찰의 권유로 1949년 10월경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좌익이 아니었다.

 

노씨는 신광지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새벽 함평여중(현 함평교육청)로 이송됐다. 함께 구금된 사람은 모두 222명. 경찰은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취했고, 222명이 나올 때까지 ‘번호 다시’를 외쳤다. 노씨는 “‘이백이십이 번호 끝’이 나와야만 밥을 먹이거나 잠을 재웠다”며 “이 때문에 222명인 것을 안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며칠 뒤 세 명은 풀려나 219명만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난 7월23일, 경찰은 이들의 신발을 벗기고 한 사람씩 손을 뒤로 묶은 뒤 다시 셋씩 묶어 차에 태웠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묶이다보니 차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함평여중 앞 큰 바위에 올라 경찰의 호각소리에 일제히 차에 뛰어올랐다. 그렇게 이들은 12대의 트럭에 분승돼 나산면 넙태로 끌려갔다. 트럭 한 차에 38식 소총을 휴대한 경찰 4명이 동승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넙태에 도착한 이들은 3인이 한 조가 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등 뒤에서 총격이 가해졌다. 오발 등의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찰 한 명당, 맹원 한 사람씩 조준 사격했다. 노씨는 귀를 맞고 살아났지만, 이를 확인한 경찰이 다시 총격을 가했다. 오른쪽 등을 가격한 총알은 그의 쇄골 뼈를 뚫고 땅에 처박혔다.

 

기절한 노씨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많은 이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을 때였다. 몇몇 가족은 지게에 관을 이고와 주검을 수습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튿날 인민군이 함평에 들어왔다.

 

함평경찰서는 좌익가담 여부에 따라 보도연맹원을 갑·을·병으로 분류해 사살했다. 먼저 갑종으로 분류된 이들은 7월13일 전남도경찰국 경비선 선상에서 총살돼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에 수장됐고, 을종은 7월21일 학교면 고막리 얼음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병종이 이곳 넙태에서 희생됐다.

 

노씨는 취재진의 물음에 한사코 답하기를 꺼려했다. “지금 와서 이런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돌아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취재진의 거듭된 설득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악몽 같은 지난날을 꺼내놓았다.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함평지역 보도연맹원들이 사살된 나산면 넙태.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중 좌익 전향자인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국적으로 최대 30만에서 최소 10만원의 맹원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커버리지(정찬대)

 

‘빨갱이’란 꼬리표, 그리고 연좌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면서 막혔던 언론의 자유도 되살아났다. 곳곳에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함평양민학살사건도 당시 한국일보가 최초 보도(1960년 5월21일자 ‘나는 시체더미서 살아나왔다’)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국회진상조사단이 꾸려지면서 현장조사도 진행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의지는 약했고, 군부의 회유와 협박도 빈번하게 이뤄졌다.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리 만무했다.

 

더욱이 1961년 곧바로 터진 5·16군사쿠데타로 양민학살사건은 또 다시 묻히게 됐고, 80년대 말 군사정권이 이어지는 내내 이 같은 현상은 계속됐다. 피해자들은 죄인인양 숨죽여 지내왔고, 가해자인 국가는 연좌제까지 걸린 이들을 더더욱 옳아 맸다.

 

앞서 소개한 정일웅씨는 5·16쿠데타 이후 곧바로 수배자 신세가 됐다. 함평양민학살 유족회는 이적단체로 낙인찍혔고, 관련자나 증언자 모두 수감됐다. 이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더 이상 이에 대한 언급을 피하게 됐다. 그러고 이러한 사실이 재조명된 것은 진실화해위 조사가 이뤄지면서부터다. 일부 유족은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 얘기를 꺼려하는 유족들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이 없다. 그 만큼 당시의 아픔과 잔상이 크고 또렷하기 때문이다.

 

해보면 모평마을에서 만난 윤경중씨는 연좌제에 걸려 1964년 경찰간부시험을 합격하고도 채용이 거부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시험을 봐도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 굉장히 괄시를 받았다”며 “정보계통으로는 갈 수도 없었고, 그나마 교직은 제재를 덜 받아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시골학교로 전근가게 된 배경을 전하기도 했다. 윤씨는 “5·18때 장학사가 찾아와 학생들을 선동해 데모한다며 시골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영광으로 발령받아 근무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학생을 선동한 적이 없었다. 윤씨는 “1987년까지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빨갱이’란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다”며 그간의 설움을 토해냈다.

 

정태진씨 역시 1966년 군 제대 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특채로 들어갔지만, 신원조회로 탈락돼 채용이 거부됐다. 그는 “연좌제에 걸려 취직도 못하고 결국 농사밖에 지을 것이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함평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어떻게 그걸 잊겠어요, 아마도 죽어서나 잊겠죠”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 말이 취재진의 마음을 더욱 억눌렀다.

 

△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 정근욱 회장은 “같은 사건으로 피해를 봤는데, 누구는 배상을 받고, 누구는 배상을 못 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하루빨리 관련법 제·개정이 이뤄져 억울한 분이 없도록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씨 역시 함평 ‘남산뫼 사건’으로 큰형 정동기(당시 19세)씨를 잃었다. ⓒ커버리지(정찬대)

 

현재까지 확인된 함평 집단학살 희생자는 1천164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898명이 진실 규명을 받았고, 266명은 미신청자로 남아있다. 문제는 진실화해위에서 규명된 사건 피해자들의 구제책이다.

 

유족들은 개별적 소송을 통해 배상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 고령인데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로선 비용 면에서나 정신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선 진실규명 결정 후 3년 이내에만 가능하도록 법원은 못 박았다. 피해자들은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고, 훗날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3년의 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지난 2009년 3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진행된 함평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 조사(2차 조사)에서 모두 486명이 진실규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가운데 좌익으로부터 피해를 본 경우(적대세력 사건)를 제외한 상당수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2007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뤄진 조사(1차 조사)의 피해자들은 ‘3년 이내 소 제기’ 규정을 몰라 구제받지 못했다. 같은 사건으로 인한 학살에도 누군가는 배상을 받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관련법 제·개정이 절실한 이유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됐다. 산등성이, 마을 구석마다 굵은 빗줄기가 건땅을 적셨다. 하지만 3월 말 춘분(春分)을 맞이한 함평의 단비는 먹구름타고 낙하한 애끓는 슬픔이요, 이름 모를 영가(靈駕)들의 피울음이자 통한의 눈물이었다. 또한 불갑산 능선 따라 배어있는 가슴 찢어지는 절규였다.

 

그들의 넋이 불갑산 꽃 무릇이 돼 푸르게 피어올랐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산 자는 죽은 자를 애타게 그리워하듯….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다음은 ‘전북 순창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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