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북 순창-③] 꽃 같던 청춘(靑春), 회문산 능선따라 흩뿌려지다
패잔(敗殘)의 기록, 빨치산 투쟁과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 정찬대 기자
  • 16.01.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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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덕유산 ‘송치골 회의’, 그리고 빨치산 재편

 

빨치산 병력은 수시로 재편됐다. 그만큼 전선의 변화가 극심했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녹음이 짙푸르던 1951년 8월의 일이다. 남부지구(회문산 일대) 역시 군경에 의한 대공세가 이뤄지자 병단을 사단제로 개편한다. 기포병단은 407연대, 카츄사병단은 408연대로 바뀌었고, 두 연대가 합쳐져 46사단을 이뤘다. 도당 보위부대를 이끈 쌍치 출신 박판서(또는 박판쇠. 그의 호를 따 일명 백암사령관으로 통함)가 사단을 총지휘했다. 전쟁 전부터 좌익으로 활동한 백암은 1956년 쌍치(전북 순창 쌍치면) 트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명 ‘이현상 부대’로 불린 <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정식 명칭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가 강원도에 편성돼 덕유산까지 내려오던 시기도 1951년 이맘때다. 그리고 이곳의 일부 병력과 함께 지리산으로 후퇴한 시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남부군>의 얘기다.

 

이에 앞선 5월 하순과 7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이현상 주재 하에 충남(위원장 남충렬: 본명 박우헌, 부위원장 유영기)·북(위원장 이성경, 부위원장 정해수), 전남(위원장 박영발 또는 박영달, 부위원장 김선우)·북(위원장 방준표, 부위원장 조병하), 경남(위원장 남경우, 부위원장 김삼홍: 본명 김병인)·북(위원장 박종근, 부위원장 이영삼)의 남한 6개 도당위원장 회의가 소집된다.

 

△한국전쟁 당시 군경토벌대와 마주한 빨치산들은 마치 파고(波高)의 강물에 내던져지듯 산속 저마다에 흩뿌려진 채 외롭고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진은 덕유산 향적봉에서 바라본 무주군 안성면과 그 뒤로 이어진 운해의 모습. ⓒ국립공원관리공단

 

빨치산사(史)에서 ‘송치골 회의’가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바로 이곳에서 이현상은 남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남한일대 유격 투쟁의 총지휘를 맡게 된다. 남한 전역에 대한 투쟁방안과 유기적인 빨치산 조직체계(각 도당의 사단제 편재 및 남부군 산하 편입)가 송치골 회의에서 모두 결정된 셈이었다.

 

다만, 전남도당과 전북도당(사단 편재만 이현상 지시에 따랐으며, 덕유산 등 일부 병력이 남부군으로 병합됨)은 빨치산 투쟁도 당이 지도해야 한다는 원칙과 중앙당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이를 거부, 독자적 활동을 전개했다.

 

‘6개 도당 회의’ 후 충남 빨치산은 68사단으로, 전북 북부지역 빨치산은 45사단으로 각각 재편됐다. 또 전북 남부의 각 유격대 역시 46사단과 53사단으로 개편됐고, 남부군 직속 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비전투 보급부대)이 구성됐다. 지리산 남단인 경남지역은 불꽃사단(경남도당 유격대)과 각 지방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57사단을 편성했다.

 

407연대 2대대와 6대대는 성수산에서 연대장 지휘를 받으며 사단본부와 함께 활동했다. 2대대 소속이던 임방규도 여기에 포함됐다. 군경토벌대 작전은 거침이 없었다. 빨치산 부대는 거의 분산됐고, 연대장 최일관은 총상을 입은 채 환자트에 보내졌다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결국 자결을 택했다.

 

참모장 이상윤이 통솔한 3대대 역시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이들 역시 토벌대에 의해 와해됐고, 이상윤은 항미연대 참모장으로 있던 1952년 12월, 중상을 입고 환자트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들은 마치 파고(波高)의 강물에 내던져지듯 이처럼 산속 저마다에 흩뿌려진 채 외롭고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덕유산과 지리산의 위치도. ⓒdaum.net

 

당원 가입과 세포 조직, 그리고 학습총화

 

사단 편재 시기 임방규는 이미 당원으로 입당한 뒤였다. 당원은 선두에서 전투에 임해야 하며, 부대원들의 사상교육도 도맡았다. 도당이나 병단의 간부급 진출이 가능한 신분이었던 만큼 입당 절차는 까다로웠다. 일반생활과 (작전)투쟁, 학습 등 여러 증명을 통해 가능했지만, 쉬이 입당이 허락되진 않았다.

 

두 사람 이상의 당원이 보증을 선 뒤 당 세포에서 가입을 결정한다. 이후 군당 조직위원회에서 최종 비준(합법적)하거나, 무장 부대의 경우 사단에서 비준(전투상황을 고려한 비합법적)했다. 사람의 사상, 사고 등에 대한 보증이었기 때문에 훗날 문제가 발생할 경우 철저하게 보증인이 책임을 졌다. 이 때문에 어지간한 신뢰가 아니고선 쉽게 보증해주지 않았다.

 

당원 3인 이상, 30명 미만이면 당 세포가 조직되고, 그 이상이 되면 세포위원회가 구성된다. 세포는 당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계급이나 업무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취급됐고, 말단 당원부터 조선노동당 당수 김일성까지 세포에 가입돼 있다. 세포 관련 규약이 따로 있어 행동지침이나 회의순서 등은 해당 규정에 따라 이뤄졌다.

 

<당원생활 준칙>

 

1. 당원은 당의 강령, 규약과 소속기관의 결정에 충실해야 한다.

2. 당 규율은 당의 생명이며 또한 당원의 생명이다.

3. 당원의 언행은 항상 당적이어야 하며 대중의 표본이 됨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4. 당원의 비조직적인 개인행동은 당의 파괴를 의미하며 당원생활의 단절을 의미한다.

5. 당원은 상부기관의 지시와 소속기관의 결의에 무조건 복종할 줄 알아야 한다.

6. 당원은 자기 소속기관 회의에서 자기의사를 강력히 주장할 권리가 있다.

7. 당의 결의는 그 결의가 다수결인 이상 자기의사와 반대되는 경우라도 비난의 자유를 포기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특징이다.

8. 당원은 언제 어디서나 목적의식적인 투사가 되어야 한다.

9. 당원은 항상 자기학습에 노력해야 한다.

10. 당원은 항상 친절하고 신망이 있고 쉬지 않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11. 당원은 항상 정세추이에 유의하여야 하며 대중의 선도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2. 당내의 일인의 적은 당외의 백만의 적보다 크다.

 

당원인 임방규도 한 달에 한차례 가량 세포회의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나온 내용은 서기가 모두 기록했으며, 한부는 세포에서, 또 다른 한부는 군당으로 보내져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물론 당원 개개인의 신상 발언까지 파악됐다. 사업(작전) 실패 시 평소 행실을 문제 삼아 “관료주의적 사업 작품”이라며 단단히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세포는 상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했기에 얼마든지 문제를 제기할 수도, 발언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당원은 사업을 나가거나 평소 생활 시 계급을 내세워 함부로 거들먹거릴 수 없었다.

 

이례적이지만 출당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출당은 세포회의에서 논의해 결정한 뒤 도당 조직위원회에서 최종 승인한다. 다만, 군당급 이상 간부의 경우 세포회의를 거쳐 중앙당에서 최종 결정했다. 도당 조직위원회는 주요 문제를 다루는 의결기구로 조직, 선전, 청년(민청)부 등의 간부들로 구성돼 있다.

 

△65년 전 꽃 같던 청춘의 절규와 한이 능선 마디마디에 배인 채 이들의 선혈은 산에 있는 모든 것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사진은 (남)덕유산 삿갓재에서 바라본 덕유 능선. ⓒ국립공원관리공단

 

부대원들의 사상학습은 수시로 이뤄졌다. 연대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407연대는 사단이나 당 선전 간부들이 연대에 파견돼 고급세미나를 열면, 중대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여 학습 받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후 이들이 교본을 갖고 중대 단위로 전체 학습을 지도한다.

 

그리고 부소대장(정치사업 담당) 예하 일개 분대에 1~2개의 학습조가 꾸려져 그때그때마다 학습내용을 평가받았다. 행군 시나 식사 시, 분대끼리 움직일 때면 늘 이를 확인했다. 말 그대로 치열하게 사상교육이 이뤄진 셈이다.

 

극한 상황 속에서 빨치산들의 이탈자가 적었던 것은 바로 이런 학습에 기인한다. 사상에 의한 통제로 행동을 조절했고, 수시로 이뤄진 비판사업(몇몇이 모여 자기반성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빨치산 용어)은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다잡았다. 이러한 주체학습은 전쟁 후 북한이 체제를 지탱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전북 순창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임방규씨와 김창근씨, 그리고 순창과 임실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기사화됐습니다. 결코 꺼내놓기 쉽지 않았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날의 청춘과 희생을 술회해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전북 순창 ④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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