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북 순창-④] 꽃 같던 청춘(靑春), 회문산 능선따라 흩뿌려지다
패잔(敗殘)의 기록, 빨치산 투쟁과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 정찬대 기자
  • 16.01.1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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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미천한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기포병단 ‘기차전복’ 작전

 

1951년 9월 병단의 규모가 컸던 기포병단은 전남도당의 요청으로 영광 불갑산 지원 작전을 폈다. 전남도당 인민유격대 불갑지구사령부는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전남 서북권을 관할해왔다. 하지만 1951년 2월20일(음력 1월15일) 이른바 ‘불갑산 대보름작전’이 전개되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이뤄졌고, 군경토벌대는 이 지역을 완전히 수복하기에 이른다.(관련기사: [전남 함평-⑤] 불갑산 꽃무릇에 배인 선불(仙佛)의 절규)

 

불갑산 지원 작전은 군경토벌대에 의한 함평지역 양민학살에 대한 보복차원에게 계획됐다. 아울러 ‘9·28 복수 투쟁’의 성격 또한 강했다. 내장산(전북 정읍·해발 763m)과 입암산(전남 장성군 북하면·해발 626m) 그리고 전북과 전남을 가르는 ‘장성 갈재’ 고개를 넘은 기포병단은 방장산(장성군 북이면·해발 743m) 능선을 타고 영광 잠입에 성공한다. 하지만 함평과 영광지역을 이미 수복한 군경의 방어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거셌다.

 

함평 곳곳을 타격했지만, 어느 곳 하나 점령하지 못한 채 되돌아와야만 했고, 기포병단은 이곳에서 엄청난 전력(戰力) 손실을 본다. 바로 연대장을 잃은 것이다. 이후 참모장 최일관이 연대장이 됐고, 그 자리를 ‘외팔이’ 이상윤이 메웠다.

 

△임실군 성수면 오류리에 위치한 오류역. 현재는 폐역(廢驛)되어 역사(驛舍)가 철거된 상태다. ⓒ열차사랑(임병국)

 

곤두박질친 병단의 사기는 참모장 이상윤이 ‘기차전복’ 작전을 성공시키면서 달라진다. 서울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전라선에는 각종 군수물자가 실린 채 호남 전역에 전달됐다. 이리(현 익산)를 거쳐 온 전라선 열차는 관촌역(전주)을 지나 큰 커브를 돌면 곧장 임실과 오류, 오수역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임실을 빠져나온 기관차는 남원과 구례를 거쳐 순천과 여수로 곧장 향한다.

 

1951년 10월, 첫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기관차에는 수많은 군수물자가 실려 있었고, 칸마다 총탄과 포탄이 가득했다. 이상윤 일행은 욕심껏 한 짐씩 짊어지고 산에 올랐다. 마중나간 병력들도 무기를 나눠지었다. 탄알이 어찌나 많던지 여기저기 수북이 쌓였다. 그간 포탄이 없어 산속에 비장해뒀던 60mm와 80mm 박격포까지 꺼내며 의기양양했다.

 

한 달여 후인 11월, 참모장 이상윤은 또 다시 대대병력을 차출해 작전지역으로 이동했다. 앞서 한 차례 작전을 성공한터라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임방규는 5번의 작전 가운데 2번의 기차전복 작전에 투입된다.

 

오류역 인근에 도착한 이들은 철로의 침목 사에 지뢰를 매설한 뒤 풀숲에 매복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역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간간히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도 뒤섞였다. ‘인간토벌이 또 시작됐구나’라며 온 정신을 귀에 집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임방규 눈에 십여 명의 주민들이 포박된 채 경찰에 의해 끌려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불과 10여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임방규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이를 지켜봤다. 방금 전 총소리가 요란했던 마을에서 끌려온 듯한 이들은 하얀 무명옷을 두른 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느껴졌다.

 

실제 오류역(현재는 폐역) 건너편 봉강리 마을에 거주 중이던 노지홍(76세)씨 어머니 최필남(당시 28세·현재 작고)씨는 그날 경찰에 의해 성서지서에 끌려간 주민 중 한명이다. 노씨는 “기차전복 작전이 이뤄질 당시 경찰이 찾아와 사람들을 끌고 갔다”며 “우리 어머니도 그때 붙들려가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후에도 경찰이 몇 번이고 찾아와 빨치산 가족을 불라며 주민들을 괴롭혔다”고 증언했다. 다행히도 어머니를 포함한 주민들은 조사 뒤 곧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다만, 5명의 주민들은 이보다 앞서 구치소 수감 중 군인에 의해 총살당했다.

 

시간은 흘러 오후가 됐다. 무료하다고 느낄 때쯤 기관차 한 대가 임실역을 출발했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재빨리 풀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콰아앙!’

 

기차가 도착하기 십여 미터 앞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뢰가 터졌다. 뒤이어 다음 지뢰가 지축을 흔들었다. 엿가락처럼 휜 철로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고, 엄청난 힘을 내뿜은 기관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1차 습격 때처럼 다량의 군사물자를 확보하진 못했으나, 열차를 전복시킨 것만으로도 이들에겐 큰 성과였다.

 

△전라선 오류역 남쪽 철길. 오류역이 폐역이 되면서 철길 역시 사라졌고, 현재는 이 길 주변을 따라 순천~완주 간 고속도로가 깔려 있다. ⓒ열차사랑(임병국)

 

1952년 1월24일, 임방규 체포되다

 

407연대(기포병단)는 2, 3, 6대대로 구성돼 있었다. 참모장 이상윤이 인솔한 3대대는 기차전복 작전을 성공시키며 사기가 충천됐지만, 연대장이 인솔한 2대대와 6대대는 성수산으로 들어가던 중 비행기 공습과 토벌대의 협공으로 적잖은 희생을 치렀다.

 

1952년 구정(1월27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회문산을 빠져나온 2대대와 6대대는 서둘러 성수산으로 갔다. 그런데 임실 삼계면 학정리에서 토벌대의 기습 공격을 받고 부대가 분산되면서 임방규는 임실과 순창 사이 용골산(해발 640미터)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대대를 만난 임방규는 분산된 부대(2, 6대대)를 규합하라는 이상윤의 지시를 받고 다시 성수산으로 향한다.

 

야음을 틈타 이동하던 중 동이 터오자 임실군 삼계면 세심리 옥내 트(집안에 마련한 아지트)를 만들어 은신했다. 토벌대 활동이 잦아들고 빨치산 세계인 어둠이 깔리길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늦은 오후 성수산으로 향하기 전 이른 저녁을 먹었다. 임방규를 포함해 5명이 밥상머리에 둘러 앉아 허겁지겁 밥을 비우고 있을 때였다.

 

‘툭’하고 한쪽 문종이가 뚫리더니 가느다란 총구가 쑤욱 들어왔다.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종일 별 일 없었던 터라 안일한 생각에 보초를 세워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모골이 선 임방규 일행은 숨을 멈춘 채 벽에 세워둔 개인화기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반대편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울타리를 비집고 나가려던 순간 논두렁에 매복한 국군이 임방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서려 몸을 돌린 그때 옆구리에 총부리가 들어왔다. 잠시 군인과 눈을 마주치며 물러선 척하다가 잽싸게 헛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명의 군인이 임방규를 제압했다. 산에서 죽을 것이라 여겼던 임방규는 그렇게 체포되고 말았다.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다른 동무들 역시 모두 다 잡혀 있었다. 이들은 전선줄에 묶인 채 성수산에 있는 연대본부로 끌려갔다. 이후 전주에 있는 사단본부로 옮겨졌다.

 

임방규를 포함해 전북지역 곳곳에서 잡혀온 반군들은 전주역 인근에 위치한 사단본부 내 임시 창고에 밀어 넣어졌다. 헌병은 이 가운데 변절자를 세워놓고 창고 안 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다.

 

어느 날 새카맣게 어린 빨치산 동무가 그로부터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창고 안 분위기를 제압하기 위한 희생양처럼 보였다. 때리면 맞고, 주면 먹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부와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뭔데 사람을 패!”

 

큰 키에 하얀 얼굴, 복장 역시 깨끗한 차림의 꽤 인물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하게 항의했다. 순간 금방이라도 뭔 일이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실 창고 안은 헌병까지 지켜선 터라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그렇게 소리칠 수 없었다.

 

잠시 매질이 멈추더니 한 헌병이 사내를 불러냈다.

 

“너 직책이 뭐야”

 

“전남도당 노령지구사령부 당위원장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헌병이 사내를 내리 찍었다.

 

“산에서 당위원장이면 당위원장이지, 어디서 큰 소리야? 여기가 산인 줄 알아?”

 

쓰러진 사내를 둘러싸고 몇몇 헌병이 몽둥이를 든 채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매질은 한참동안 계속됐다. 어린 동무가 상황을 모면하는 대가로 사내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전북 순창편은 회문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임방규씨와 김창근씨, 그리고 순창과 임실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기사화됐습니다. 결코 꺼내놓기 쉽지 않았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날의 청춘과 희생을 술회해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전북 순창 ⑤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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