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남 화순-②] 화순 곳곳의 상흔,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인민군 복장한 軍…대량학살 불러오다
  • 정찬대 기자
  • 15.10.2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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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핏빛으로 물든 수양산 자락의 늦가을 들녘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피의 학살’을 당한 하갈마을에는 화해와 상생, 평화를 주제로 한 벽화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널브러진 팔은 감각이 없었다. 솟구치는 선홍의 핏줄기 속에 드러난 하얀 뼈마디가 아슬아슬 손목을 지탱하고 있었다. 늦가을 추위는 만신창이 된 그의 살점을 차갑게 파고들었고, 뜨거운 눈물은 목을 타고 한없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죽는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물밀듯 몰려왔지만, 공포감에 휩싸인 그는 소리 내 흐느끼지도 못한 채 고통을 삼켰다.

 

통증은 점차 사라지고 정신은 시나브로 희미해져갔다. 주민 수십 명과 함께 총살당한 핏빛 가득한 월곡마을 뒷산 구릉은 이내 가을볕 따스한 들녘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선 그는 늦가을 햇살을 등에 댄 채 한가로이 보리밭을 갈고 있었다.

 

1950년 11월10일 이른 새벽부터 일어난 류동호(당시 17세)씨.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시작이었다. 황금빛 보리를 수확하는 상상을 하며 간간히 흥얼거리기도 했다. ‘가을 안개는 풍년을 부른다’고 했던가. 때마침 이무기 같은 하얀 안개가 마을 건너편 수양산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하갈마을 언덕 위에서 바라본 수양산 모습. 수양산을 넘어온 국군은 몇몇 마을을 거쳐 하갈마을에 당도한 뒤 대대적인 학살을 단행했다. ⓒ커버리지(정찬대)

 

전날 빨치산들이 식량을 약탈해간 탓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는 점심을 대충 때우고, 냉수로 곯은 배를 채운 뒤 다시 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오후 4시경, 늦가을 찬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인민군가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닥칠 공포를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이것이 학살의 전주곡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류씨를 비롯한 하갈마을 주민들은 빨치산 이동로인 이곳에 살면서 인민군을 자주 봤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인공기를 들고 인민군 복장을 한 괴한들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들을 끌어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보리밭을 갈던 류씨도 어느새 그 무리에 섞여있었다. 이들은 마을주민을 구타하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강요했다. 전날 마을에 머물렀던 빨치산 부대로 착각한 주민들은 이에 동조했고,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둘씩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그렇게 이들은 ‘용공분자’로 분류됐다.

 

△하갈마을에서 바라본 학살 장소 모습. 군인들은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마을 노인들이 오열하자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거치한 뒤 그대로 난사했다. ⓒ커버리지(정찬대)

 

軍, 인민군으로 위장…‘빨갱이 부역자’ 강요

 

모든 것이 ‘함정’인 것을 아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인민군 복장을 한 10여명의 무리 뒤로 일개 중대(100~120여명) 규모의 군인들이 후방을 지원하며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들은 수양산을 넘어온 국군 제11사단 20연대 3대대 12중대 군인들이었다. 동향 파악을 위해 인민군으로 위장한 선발대가 먼저 마을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 부역자’를 가려낸다는 명분하에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했고, 강요에 의한 ‘동조’를 얻어냈다.

 

하지만 일부 군인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보여주며 자신이 국군임을 알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맹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사람들만 보면 무조건 총살시켰지만, 일부 양심 있는 군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괴뢰군 복장을 한 사람 중 일부는 뒷주머니에 태극기를 꼽아놓고 일부러 이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박종섭씨는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증언을 통해 “군인들이 갈전리와 월곡에서 인민군복을 갈아입고 주민들을 속였는데, 몇몇 군인들은 몰래 태극기를 보여줬다”고 증언한 바 있다.

 

태극기를 본 주민들은 구타를 당하는 속에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이들은 결국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마을사람을 연령별로 분류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류씨는 조심스레 학생들 틈에 끼어있었다. 그런데 한 군인이 그의 큰 키를 보며 “이 새끼는 왜 여기 있어, 저쪽으로 안가”라며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어른들 틈으로 내보냈다. 친구들과 분리된 그 순간 류씨는 직감적으로 ‘죽음’을 예감했다.

 

△하갈마을에서 총살장으로 올라가는 길. 새끼줄로 포박된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커버리지(정찬대)

 

그는 40여명의 어른들 틈에 섞여 하갈마을과 맞닿아 있는 월곡마을 뒷산으로 끌려갔다. 새끼줄로 포박된 이들은 머리를 숙인 채 앞 사람 뒤꿈치를 바라보며 한발 한발 걸음을 내딛었다. 행여 머리를 들었다간 거침없이 개머리판이 들어왔다.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몇몇 노인들은 마을 앞에서 발만 동동거린 채 오열했다. 산 중턱에 오른 군인들은 이 모습을 보며 하갈마을 쪽으로 총격을 가했다. 그 와중에 박영자(당시 15세)씨의 어머니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박씨의 오빠 박남종(당시 31세)씨는 이날 총살장에서 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전남 화순 ③편’이 이어집니다>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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