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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피선거권은 왜 ‘40세 이상’일까?
박정희가 대선출마 나이를 헌법에 규정한 이유
  • 정찬대 기자
  • 15.11.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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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으로 선거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현재 40세에 달하여야 한다”

 

헌법 제67조 ‘대통령 피선거권(출마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즉,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선 적어도 40세 이상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우리 헌법에 명시돼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년에 대한 규정은 없다.

 

대통령 피선거권은 제헌헌법부터 명문화됐지만, 출마 제한 나이를 헌법에 규정한 것은 1962년 12월 이른바 ‘군정대통령제 개헌’(5차 개헌)이 처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통령 직무대행을 하던 시기 이를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우리나라 피선거권 규정을 먼저 살펴보면 1948년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법령 제175호에 근거 규정을 둔 것이 관련법의 효시다. 국회의원의 경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선거일 현재 만 25세에 달한 자에게 피선거권이 부여됐으며, 1950년 4월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 이를 명문화함으로써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문제는 대통령 피선거권에 대한 헌법 규정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 발췌개헌을 통해 공포된 법률 제247호 <정·부통령선거법>에 따르면 “국민으로서 만 3년 이상 국내에 주소를 가진 만 40세 이상의 자는 피선거권이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 전 대통령이 “40세 이상” 규정만 따로 빼 헌법에 명문화함으로써 개정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더욱이 “헌법개정안은 국회가 의결한 후 6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헌법 제121조)는 조항을 추가함으로써 박 전 대통령은 또 한 번 관련 규정에 대한 ‘시건장치’를 마련해 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모습(사진=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60년대 초 정치상황과 ‘30대 기수’

 

그렇다면 유독 대통령 출마 제한 나이(국회의원 출마 제한 나이는 선거법에 규정돼 있음)를 헌법에 못 박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선 당시 국내외 정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면내각의 무능함에 민심은 크게 이반됐고,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신-구파로 나뉘어 갈등했다. 이런 가운데 군사쿠데타를 통해 민심을 수습한 박 전 대통령은 ‘다시는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발언으로 민정이양 약속을 파기, 1963년 제5대 대선에 출마한다. 결과적으로 군홧발로 정권을 획책한 셈이다.

 

이에 앞서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영삼(YS)은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에서 재선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이듬해 원내 부총무까지 오르면서 정치적 몸집도 키웠다.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된 이후에는 민정당 초대 대변인을 맡아 야당 소장파 정치인으로서 박정희 군부 세력과 각을 세우는 등 차세대 인물로 주목받았다. 대중적 인기와 정치적 중량감을 키운 그가 박 전 대통령 눈에 달가울 리 만무했다.

 

5·16 쿠데타 이후 ‘반군정 운동’을 한 이철승도 1948년 26살의 나이로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낙선)한 ‘젊은 피’다. 1954년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까지 3선 의원을 지낸 그는 장면 정부 당시 민주당 신파 내에서 이미 청소년 소장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한 기린아였다.

 

이철승은 박정희의 회유를 거부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쿠데타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이후 정치규제가 풀리면서 1964년 귀국했지만, 곧바로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이철승은 선배로부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너를 없애라고 명하는 것을 들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자 신세가 됐다.

 

장면 총리의 지명으로 민주당 대변인을 지낸 김대중(DJ)은 3전4기 끝에 1961년 재보궐 선거에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 3일 만에 국회가 해산되고,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된다. 이후 해금(解禁) 대상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민주당 재건과 함께 당 대변인으로 다시 활동하면서 발군의 강단(剛斷)을 선보인다.

 

특히,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의 정당 가입을 금지한 헌법규정을 위반한 사실을 찾아내 폭로함으로써 박정희 군부를 당혹케 한다. 박정희의 입당 날짜를 두고 법적 다툼까지 일었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랴부랴 초헌법적 통치법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개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좌)과 김영삼 전 대통령 모습.

 

박정희의 입당 꼼수와 ‘젊은 기수론’ 견제

 

1963년 10월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씨 (대선)입후보 등록공고효력정지처분 사건’과 관련, 신청인 측은 “박정희씨가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날은 9월4일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 개정이 있기 전인 8월30일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중앙선관위 측은 “박정희씨가 8월30일에 입당원서를 제출, 9월4일 성동지구당에 입당원서를 접수시켰다”며 “박씨의 법적효력을 갖는 정식 입당일은 지구당에 접수시킨 9월4일이 된다”고 강변했다. 재판부는 박정희를 포함해 신청인 측에서 요구한 증인 신청을 기각했다.

 

박정희는 이에 앞서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통해 4천여명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바 있다. 그리고 5차 개헌이 공포(12월26일)된 이듬해 1월, 이들의 족쇄가 풀린다. 하지만 김대중은 예외였다.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한겨레신문>을 통한 회고담 ‘고난의 길, 신념의 길-이희호 평전’에서 “남편은 해금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얼마 뒤 중앙정보부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며 김 전 대통령을 회유한 사실을 언급했다.

 

이어 “우리 제안을 거절한다면 앞으로 8년 동안은 정치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협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1971년 제7대 대선 전까지 정치를 못할 것이란 윽박인 셈이었다. 김대중은 거부했고, 결국 2차 해금 대상에서도 제외된 뒤 공화당 창당 다음날인 1963년 2월27일 복권된다. ‘30대 기수’들을 사전에 차단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 위한 모든 수순을 끝낸 뒤였다.

 

박정희의 ‘젊은 기수론’ 견제에는 국제정세도 한몫했다. 1960년 미국 역사상 선거로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이 선출된 것이다. 바로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다. 그의 나이 불과 42세에 지나지 않았다. 케네디는 39세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도 44세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점을 감안할 때 신예로 떠오른 정치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그의 견제 대상인 셈이었다. 그리고 젊은 기수들이 배제된 채 치러진 제5대 대선(1963년)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46.6%를 획득, 45.1%를 차지한 윤보선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차는 겨우 15만 6026표(1.5%)에 불과했다.

 

이후 치러진 제6대 대선(1967년) 역시 야당의 젊은 지도자들은 ‘40세 이상’ 규정에 발이 묶여 입후보에서 배제됐고, 윤보선 후보와 재대결을 펼친 박정희는 또 다시 재집권에 성공한다. 한일협정 졸속 처리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베트남전쟁 파병 반대가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이었지만, 장면 내각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바라보는 국민적 시각은 이미 ‘무능’과 ‘구악’이었다. 여기에 70세의 고령인 점도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1967년 제6대 대선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선거 포스터(좌)와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선거 포스터.(사진=인터넷 커뮤니티 및 김대중평화센터)

 

1971년 대선, 박정희 vs 김대중

 

1971년 ‘40세 이상’ 규제에서 풀려난 양김(김영삼-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박 전 대통령을 턱 밑까지 추격한다. 여기에 이철승 의원까지 가세하면서 ‘세대교체 바람’에 불을 댕긴다. 당시 김영삼의 나이 42세, 김대중 44세, 이철승 47세였다.

 

김영삼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1969년에는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으로 정국이 떠들썩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삼선개헌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한 김영삼(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을 살해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테러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1970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마지막까지 양김이 경쟁한 끝에 김대중 후보가 최종 선출됐다. 박 전 대통령은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됐다는 소식에 ‘줄담배’만 피웠다고 전해온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박 전 대통령은 ‘한번만 더 맡겨 달라’고 호소했고, 김 전 대통령은 ‘3선은 있을 수 없다’며 맞섰다. 결과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634만여표(53.2%)를 획득, 539만여표(45.2%)를 얻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또 다시 당선된다.

 

하지만 부재자투표에서 박정희 후보의 몰표가 나온 데다, 호남지역을 포함한 상당수 표가 ‘무효표’로 분류되면서 부정선거 의혹이 일었다. 여기에 두 사람의 표차도 94만 7천여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정희와 중앙정보부 공작에 의한 결과라는 세간의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김대중을 상대로 신승(辛勝)한 박 전 대통령은 대선 이듬해인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 강력한 통제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박정희 최대 정적인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 측근들 역시 대거 구속됐으며, 훗날 김영삼에 대해서도 의원직을 제명하는 등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국회 본회의장 모습(사진=커버리지 DB)

 

권력구조 개편에 맞춰진 개헌 논쟁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32세 나이로 아칸소주(州) 주지사로 선출됐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도 46세에 불과했다. 오바마 현 대통령도 47세에 대통령이 됐다. 1960년 존 F. 케네디는 미(美) 역사상 선거로 당선된 가장 어린 대통령이 됐다. 그의 나이 42세(당선 해)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폴란드에서 안드레이 두다가 43세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돼 지난 8월초 취임했다.

 

우리는 ‘나이’를 통한 사회적 제도 규율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청소년보호법에 명시된 청소년의 나이(만 19세)가 그렇고, 촉법소년 연령(10세 이상~14세 미만)과 형사처벌 나이(만 14세 이상)도 그렇다. 선거 관련 규정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피선거권 규정이 헌법에 명시된 평등권이나 공무담임권을 심히 저해한다는 것이다. 출마 제한(나이)을 없애되, 유권자가 후보자를 적절하게 판단하면 될 일을 과도하게 이를 규제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40세 이상 돼야만 나라를 통치할 식견을 가진다? 유교적 이념이 지배한 시대착오적 발생이다. 그리고 이는 박정희 군사 정권이 향후 경쟁자가 될 ‘싹’을 자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다.

 

지난 18대 대선 당시 유권자들은 안철수 후보에 대한 높은 지지와 기대감을 보이면서도 이면에는 정치 경험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행정부 수장으로서의 역량을 의심했다. 이 때문에 지지율과 득표율이 다를 것이란 분석도 곳곳에서 나왔다.

 

실제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투표 전날까지 15%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지만, 선거 당일 득표율은 5.8%p를 얻는데 그쳤다. 야권 분열에 따른 위기감으로 ‘전략적 선택’(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에 대한 지지로 입장선회)을 강요당한 점도 한몫했겠지만, 문 후보 역량에 대한 의구심도 표의 이반현상을 가져온 요인으로 지목됐다. 결과적으로 유권자가 알아서 판단하면 될 일인 것이다.

 

그동안 개헌을 언급할 때 ‘4년 중임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등 권력구조 개편에만 주목했다. 이 때문에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야 간 접점 찾기가 더욱 힘들 것이란 얘기도 많았다.

 

국민 기본권을 외면한 채 거시적 담론만 부각되다보니 개헌 논의는 늘 정쟁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40세 이상’ 규정처럼 시대착오적이며, 불합리한 조항도 곳곳에 숨겨져 있다. 우리가 헌법 개정 논의를 좀 더 폭넓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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