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북 남원·임실-②] 그들이 겪은 것은 ‘진짜 전쟁’이었다
이데올로기 사슬에 순장이 된 사람들
  • 정찬대 기자
  • 17.11.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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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리지>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당시 기록을 싣습니다. 국가폭력의 총성이 멎은 지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더 흘렀지만, 백발의 노인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아로 삼켜내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애써 지우려 했던,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누군가에게 꼭 남겨야할, 그것이 바로 <커버리지>가 ‘민간인 학살’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민간인 학살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의 얘기며, 또한 미래에도 다뤄져야할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부분입니다. 좌우 이념대립의 광기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성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사는 호남(제주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이 다뤄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분뇨 먹고 나는 살았다

 

참수를 끝낸 군인들은 목이 잘린 주검에 소금을 뿌렸다. 핏빛 가득한 현장에도, 자신의 군복에도 하얗게 소금을 던졌다. 누군가는 비린내가 나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귀신이 들러붙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강석마을에서 바라본 기럭재 모습. 군인들은 마을 뒷산인 기럭재를 넘어와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커버리지(정찬대)

19명을 참수한 군인들은 사람들이 집결된 장소로 되돌아왔다. 이어 18세부터 40세까지 남녀 구분 없이 주민 50여 명을 포박해 그럭재 방향으로 끌고 갔다. 여느 마을과 비슷한 풍경, 강석마을도 이제 어린이, 아녀자, 노인들만 남았다.

 

산을 넘기 전 군인들은 그 앞 논에 주민들을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집중 사격을 가했다. 그럭재에 부딪힌 총성이 강석마을에 넓게 퍼졌다. 불과 몇 시간 만에 1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군인들은 그럭재를 넘어 남원 시내로 유유히 빠져나갔고, 이날 주민의 피해는 고스란히 전과(戰果)로 남았다.

 

군인들이 그럭재로 빠져나가던 그 시각, 김점동 씨가 기적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피범벅이 된 땅바닥을 벅벅 기어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이어 야트막한 담을 넘어 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똥통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늠이 안 섰다. 그만큼 아무 정신이 없었던 게다. 김 씨는 분뇨를 찍어 먹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물컹한 분뇨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강석마을에 거주 중인 김수영 씨. 그의 아버지 김점동 씨는 군인이 내려친 일본도를 맞고 쓰러졌다. 김점동 씨는 버둥거리며 변소로 기어간 뒤 분뇨를 먹고 살아남았다. ⓒ커버리지(정찬대)

 

누나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나선 김수영 씨는 마을회관 앞에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야 만다.

 

“뜰에도, 도랑에도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사방에가, 아이고……. 참수된 사람들은 목이 완전 동강나진 않고, 뒷덜미가 거의 잘린 채 앞에 가족만 붙어 있더라고. 뒤에서 목을 쳤은게 근거제. 그래서 누구 시신인지는 확인이 가능했지”

 

김 씨는 “(아버지가) 정신력으로 버텼다”고 했다. 그는 “어깨는 다 파였고, 뼈는 하얗게 드러났다. 살점도 파여서 근육이 쏙 들어가 있었다”며 아버지 상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참수된 사람 중에 아버지 혼자만 살았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그날을 술회했다. 김점동 씨는 이미 20여 년 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은 “후유증으로 마지막까지 꽤나 고생한 뒤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임실 폐광굴 ‘오소리 작전’

 

국군 제11사단의 토벌 작전은 한동안 계속됐다. 1951년 2월 발생한 거창·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을 계기로, 4월 호남지구 토벌 작전이 국군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에 인계될 때까지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작전 부대가 교체됐다고 해서 민간인 학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과 토벌은 늘 함께 병존했다.

 

△국립임실호국원 왼편 산기슭에 위치한 강진면 백련리 구운광산 입구. 이 굴에서 주민 수백 명이 매캐한 연기에 질식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에는 갓난아이도 포함돼 있었다. ⓒ커버리지(정찬대)

한이 서려 차갑게 굳어버린 곳, 시공간이 멈춰선 채 하나로 뒤 틀려버린 갱도, 그 안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또한 을씨년스러웠다. 이데올로기 사슬에 순장이 되어 땅 속 깊은 곳에 묻힌 그들은 60년 넘는 세월 동안 새카맣게 타버린 절규를 삭히었다.

 

전북 임실군 청웅면. 서쪽으로 순창 회문산이 있고, 동남쪽에 지리산이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전주와 곧장 연결된다. 호남과 영남 각 도당은 물론, 이현상이 이끈 남부군 총사령부가 지리산을 근거지로 후방 교란 작전을 폈고, 회문산에는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가 자리해 도당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회문산 망월봉의 임실군 유격대(전북도당 산하 독립 중대)는 수시로 게릴라전을 펴며 군경과 대치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청웅면은 수많은 이가 좌익으로 몰려 피를 흘려야만 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더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고, 이것이 또 빌미가 되어 더 큰 학살을 불러왔다. 700여 명의 원혼이 뒤섞인 임실 청웅면 폐광굴은 그 대표적인 장소다.

 

일제강점기 금광이었던 ‘부흥광산’은 청웅면(남산리)과 강진면(부흥리)에 걸쳐 있는 꽤 큰 규모의 금광이다. 모두 32개 입구가 있고, 금을 캐기 위한 수평 및 수직 갱도가 어지럽게 얽혀 있다. 또 내부가 원체 넓어 한 번 들어가면 입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임실에서 만난 전상하 씨(당시 20세)는 할아버지를 찾아 동굴 안에서 10시간 넘게 헤맸다고 했다. 그만큼 동굴 안이 넓고 복잡했다는 얘기다.

 

△임실에서 만난 전상하 씨는 사람들을 찾아 동굴 안에서만 10시간을 넘게 헤맸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자신이 귀신에 홀린 줄 알았다고 말했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11월 큰집 식구들이 폐금광에 있다고 해서 처음 들어가봤다. 모두 세 번 들어갔는데, 처음 갔을 때 세 명이 담을 쳐놓고 생활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을 못 찾아서 10시간 이상을 헤맸다. 하도 사람이 안 보여서 귀신에 홀렸나 싶어 다리를 꼬집으며 안에 헤집었다. 나와서 보니 허벅지가 시퍼렇게 멍들 정도였다. …… 동굴 안은 대도시처럼 크고 넓다. 갱도가 위로 뚫린 데, 아래로 뚫린 데, 또 옆으로 뚫린 데. 금맥 찾으려고 땅을 팠다가 없으면 다른 데 파고 그랬던 게 그대로 남아 있다. 산이 굴 위에 붕 떠 있을 정도로 많은 굴이 파헤쳐져 있다. 안에는 물이 있어서 밥도 해먹고 취사도 하고 그랬다. 또 통풍이 잘돼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전상하씨 증언 중에서)

 

폐광굴은 빨치산의 집결 장소로도 활용됐다. 회문산에서 후퇴한 전북도당 사령부는 폐광굴을 거쳐 지리산 뱀사골로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회문산 대토벌이 전개된 1951년 3월, 폐광굴 토벌 작전도 함께 이뤄졌다.

 

1951년 3월 14일, ‘폐광굴 분화 작전’이 시작됐다. 일명 ‘오소리 작전’. 제11사단 13연대 2대대가 진두지휘했다. 당시 13연대장은 최석용 대령, 2대대장은 양춘근 소령이었다. 실제 작전은 7중대가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임실경찰서장 기우대, 청웅지서 주임 임학종, 청웅면 치안대장 한병우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탈출을 막기 위해 32개 출구 가운데 28개를 틀어막았다. 나머지는 연기가 잘빠지도록 입구를 열어뒀다. 작전 첫날 이를 방해하는 빨치산 공격이 있었지만 신경 쓸 만한 화력은 못됐다. 수류탄 등으로 응전하니 금세 잠잠해졌다.

 

△청문면 남산리 남산광산 쪽에서 바라본 남산리 마을 전경. ⓒ커버리지(정찬대)

 

고춧대와 솔잎 등을 긁어모은 뒤 불을 지폈다. 4개 입구가 서로 연결돼 있어 연기는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젖먹이 아이가 가장 먼저 죽고, 어린아이들이 다음으로 죽어갔다. 이어 폐가 좋지 않은 노인들이 숨을 컥컥거리며 쓰러졌다. 매캐한 연기에 몇몇이 반대편으로 나왔지만 이들을 기다린 건 군경의 집중 사격이었다.

 

앞서 나온 이들이 총탄에 쓰러지고 뒤이어 뛰쳐나온 이들이 또 다시 총탄에 엎어진 채 그대로 포개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굴이 막히면 시체를 치우고 또 다시 응전 사격을 가했다. 질식해 죽든지, 총 맞아 죽든지 둘 중 하나였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본 기사는 <프레시안>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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