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원
‘인간다움’의 이상향 추구한 ‘레닌의 꿈’
[인문학 두드림] 영화 ‘굿바이 레닌’이 주는 진지한 조언
  • 유재원
  • 15.11.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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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모스크바에 며칠 머물렀다. 철의 장막 안쪽이자 공산주의의 심장부였던 곳이다. 지금은 개혁·개방도 옛말이 되어 밤새도록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 자본주의식(?)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런데 이곳에서 100년 전 레닌 같은 혁명가가 벌인 일들은 세상에 없던 ‘놀라운’ 것이었다. 역사의 순탄한 흐름을 이어온 봉건시대, 근대사회를 한 번에 엎어버렸던 사람, 불꽃같은 혁명가 ‘레닌Ле́нин’.

 

사실 법학도이자 변호사였지만 그의 변호사 시절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작은 사건에도 지독하게 매달렸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법정에서 본인의 특기를 살려 긴 웅변을 쏟아냈어도 결국 가난한 변호사에게 후한 판단을 내려줄 법원은 없었던 게다.

 

분노한 청년 변호사, 법과 원칙을 망각한(?) 레닌은 결국 사회를 뒤엎기로 결심한다. 청년 변호사 레닌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가 사회운동가로 나서자 러시아 전역은 들썩거렸다.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훗날 후계자들이 혁명 과업을 이어가 마침내 유럽의 절반을 레닌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반백년 만에 만들어낸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허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 동서독의 통일, 동구권 공산주의의 몰락은 한 순간에 혁명가 레닌과 작별하는 신호탄이 됐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고립과 후진성을 벗어나고자 서구를 찬미하며 개혁·개방이 시작됐다. 이후 소련,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공산주의 사회들은 옛 이름을 버리며 개명했고, 나아가 속내까지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변화했다. 물론 그 변화에 대한 전 세계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다.

 

그런데 ‘레닌’이라는 낡은 인물과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같은 구체제를 끄집어내 소중한 가치를 기억시켜주는 영화 한편이 있다. 볼프강 벡커(Wolfgang Becker) 감독의 영화 『굿바이 레닌』(2003년 作)이다.

 

이 영화는 통일 독일에서 동독을 희구하는 것조차 우습게 되어버린 현실을 드러낸 작품이다. 통일 전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공산당원 어머니를 위해 가족들이 벌이는 동독 재현극이 그 줄거리인데, 어머니를 둘러싼 주인공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동독에서 모두가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고 있는 모습을 가공하려 애쓴다. 주인공들은 선량한 거짓말로 동독 애찬자인 어머니를 속이고, 어머니 임종에 이르러서도 공산권을 찬미하는 자작뉴스를 만들어 제법 아름답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과거지향적인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때가 좋았어’라는 생각을 내비치는 이 코미디 영화는 정작 무거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감독은 희화화된 통일 독일 사회를 꼬집으며 레닌이 꿈꾼 이상사회(utopia)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금 요구하고 있다.

 

감독이 그토록 희구하는 ‘레닌의 꿈’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이 노동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모든 사람이 쉴 수 있도록 주거를 마련해주며, 모든 사람이 생활할 수 있도록 생필품을 마련해 주는 나라.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진정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 감독은 역사상 비참하게 끝나버린 레닌의 실험을 돌이켜보며 사회주의가 만든 아름다운 가치를 곱씹고자 노력한 듯 보인다.

 

“우리는 가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인생에는 물질보다 값진 것들이 많습니다. 선량한 마음, 건강한 노동, 새 삶의 희망 같은 것들이죠”

“실현된 이상향. 그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대사다. 이 말을 들으면 오래전 기억 속에 있는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作)」에서 주인공이 내뱉던 대사,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렇다면 산업화가 진행되고, 물질이 풍부해졌으며, 삶이 편리해진 지금의 우리 현실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청년 실업(일자리문제), 주거문제, 범죄, 불신풍조 등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작금의 음울한 세계를 관조하며, “아 옛날이여”를 읊어대는 구닥다리(?) 영화는 세계를 향해 진지한 조언을 날린다.

 

바로 “우리는 ‘사람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중시하고, 사람이 필요한 것들을 아픔 없이 구하도록 한’ 이상적인 국가를 희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청년 변호사 레닌이 평생토록 추구했던 이상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누구나 안다. 그 혁명의 시도가 역사상 최악의 실패로 끝난 것도 알려진 바다. 레닌은 떠났고 그러한 혁명은 다시금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이자 혁명가가 이룩한 세상은 비록 아름답지 못했어도, 인간다움과 인간스러움을 존중하려 시도했던 레닌의 꿈은 이념과 세대를 막론하고 영구히 아름답게 남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괴짜 영화감독의 말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굿바이 레닌!”

 

유재원 변호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입법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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