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두
‘미운 세 살’…‘때려주고 싶은 일곱 살’
[구병두의 교육에세이] 상전(上典)이 돼버린 아이…인성교육의 중요성
  • 구병두
  • 16.04.1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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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말귀를 제법 알아듣는 아이들도 어찌된 영문인지 일곱 살만 되면 천방지축 청개구리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미운 일곱 살’이란 말이 생긴 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미운 일곱 살도 옛말이 돼버렸다. 미운 일곱 살 대신 ‘미운 세 살’, ‘때려주고 싶은 일곱 살’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으니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다.

 

아주 오래 전 서울의 한 달동네에 살던 시절 강의를 끝내고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향해 걸어가는 데, 제법 경사진 언덕길에서 어느 낯선 할머니와 손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너더댓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할머니의 달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길바닥에 드러누워 억지를 부리고 있었고, 그 때 막 옆을 지나가는데 할머니가 쪼그린 자세로 쳐다보면서 “할아버지가 이놈 하신다!”라고 말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 이름 모를 할머니는 필자의 머리카락 색깔만 쳐다본 것이었다. 허리를 꼬부린 할머니는 서른이 갓 넘은 젊은이에게 할아버지라고 말한 것에 대해 미안했던지 묻지도 않았는데 당시 상황과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었다.


얘기인즉, 동네 문구점을 지나치면서 아이는 갖고 싶은 장난감을 보고 사달라고 떼를 썼고, 할머니는 돈이 없어 나중에 애 엄마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사주겠노라고 약속했는데도 아이가 막무가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요즘 애들이 말을 안 들어서 큰일”이라고 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벌써 삼십 성상이 흘렸다. 그 때만 해도 일곱 살을 초등학교 입학 직전의 억지와 고집으로 똘똘 뭉친 나이라 하여 ‘미운 일곱 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옛날의 고집불통 일곱 살이 더욱 조숙해져서 ‘미운 세 살’ 또는 ‘때려주고 싶은 일곱 살’이라고들 얘기한다.


이런 천방지축의 때려주고 싶은 일곱 살짜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귀를 제법 잘 알아듣는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교육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순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학부모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아이를 양순한 아이로 바꿔놓은 선생님께 감사하게 되는 시기도 이즘이다.


천방지축의 어린 녀석들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사회화가 시작된다. 여기서 사회화(socialization)란 사회구성원이면 누구나 알고 지켜야할 사회적 규범, 이를테면 모국어, 협동심, 예의범절 등을 내면화(internalization)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성악설’도 교육의 힘 앞에서는 그 설득력을 잃게 된다. 고집불통의 아이를 말 잘 듣는 아이로 변화시키는 교육의 힘이야말로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아이의 습관이나 버릇은 대부분 유유아기(乳幼兒期) 때 가정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좋은 습관일수록 어렸을 때부터 길러야 한다. OECD 가입국가 가운데 출산율이 가장 낮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아이의 위상이 적어도 가정에서는 상전(上典)이 된지 오래다.


옛 어른들은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키웠다. 집안의 대를 이어가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아들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집안일수록 거기다가 경제적인 형편이 나을수록 외아들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웠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도리어 그 반대였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겠지만 옛날 다산시절(多産時節)의 외아들과 오늘날 외아들은 존재 가치적인 측면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아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 귀한 자녀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노심초사하였을 텐데도 오히려 엄하게, 그리고 반듯하게 키웠던 어른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다. 잘은 몰라도 유교가 지배했던 전통 사회에서는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존재하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이유로 단산(單産)하는 오늘날 우리사회는 더욱 버릇없는 아이가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경쟁이 몸에 배어있는 요즘 세태에 마치 남의 자식이 잘못되어야 내 아이가 반사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비뚤어진 부모의 자녀관이 버릇없는 아이를 양산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도 모르겠다. ‘남의 자식이 잘되어야 내 자식도 잘된다’는 유태인의 자녀 교육관을 깊이 생각하며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과거와 달리 지적교육에 매달려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늘날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녀교육이 버릇없는 아이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버릇없는 아이가 어른이 되면 잘못된 자녀교육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구병두 교수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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