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박근혜와 박원순
‘무능한 권력욕’의 무서움…유성룡·이순신이 없다
  • 정찬대 기자
  • 15.06.1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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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역사드라마 <징비록>이 화제다. 특히 무능의 절정을 보이고 있는 선조와 백성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광해군의 대립과 견제는 유성룡의 기록 ‘징비록’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유성룡은 이 기록을 통해 전란 중 군주의 역할과 신하된 도리, 그리고 무능한 왕이 어떻게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 수 있는지 일깨워준다. 또한 그것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백성을 버린 임금과 그런 임금을 버린 민심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왕권과 왕실의 정통성이 결국 ‘민심’에 있음을 강조한다.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일본군의 북상에 장애물은 없었다. 관군은 오합지졸이었고, 조정은 당파싸움에 매몰돼 있었다. 군주는 무능했고, 또한 무기력했다. 열등감에 휩싸인 선조는 자신의 무능에 관대한 반면, 민심을 얻은 인재에 대해선 질투하고 경계했다. ‘무능한 권력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420여 년 전 선조의 모습은 말해주고 있다.

 

△(사진=KBS1 역사드라마 ‘징비록’ 화면 캡처)

백성을 버린 임금, 그런 임금을 버린 민심

 

신립의 탄금대 전투 패전 후 류성룡을 비롯한 대신들이 도성 사수를 주장했지만, 선조의 마음은 결사항전과 거리가 멀었다. 파천을 통해 어떻게든 위험을 벗어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백성의 안위나 구국(救國)은 이미 그에게 남 일이었다. 선조가 인조, 고종과 함께 조선의 3대 무능한 왕으로 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비바람 치는 새벽, 선조의 어가가 북쪽으로 향하던 날 텅 빈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성난 민심의 불꽃이 타올랐다. 제 한 목숨 살자고 백성을 내팽개친 국왕에 대한 적개심과 울분의 표출이었다.

 

선조는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도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피난 갈 것을 우긴다. 대신들이 반대하자 “사방이 왜적인데,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절규한 뒤 “오늘날 이 치욕은 모두 그대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드라마 ‘징비록’ 대사 중)며 시쳇말로 ‘유체이탈 화법’까지 쓴다.

 

망명이 무산된 뒤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조정을 둘로 나눈다. 바로 분조(分朝)다. 원조정(元朝廷)은 의주에서 선조를 호위하고, 광해군이 이끈 소조정(小朝廷) 분조는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민심을 다독이며 전란수습에 나선다. 결국, 왕이 하지 못한 일을 세자가 한 것이다.

 

여차하면 의주에서 국경을 넘을 생각만 하던 선조와 달리 광해는 백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고통을 함께 했고, 위험지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이들을 독려했다. 광해의 분조는 사실상 항전의 구심점이었다.

 

광해가 민심을 얻자 선조는 몹시도 불안해졌다. 결국 분조를 폐하고 조정을 합치겠다고 명한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광해 편이었다. 좌찬성 정탁이 광해군에게 “민심은 이미 저하를 인정했사옵니다. 기회는 기다리면 올 것입니다”(드라마 ‘징비록’ 대사 중)고 말한 부분은 이를 잘 방증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일 국립의료원을 방문해 의료진을 격려하는 모습.(사진=청와대)

국민안전 외면한 정부, 그리고 대통령 등진 민심

 

많은 이들이 드라마 <징비록>에 열광하는 것은 당시 기록이 현 시대를 그대로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과 국가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60갑자(甲子)를 7바퀴 되돌린 420여 년 전 기록은 놀랍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 환자가 속출하고, 사망자수가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정부의 대응은 무기력하고 무능했다. 알량한 통제욕을 버리지 못하고 정보를 움켜쥔 채 공개를 꺼려했다. ‘메르스 괴담’ 운운하며 국민의 입은 틀어막았다.

 

일 년 전 세월호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실종됐고, 어떤 대처나 대응 능력도 보이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선원의 안내방송과 “메르스 괴담에 현혹되지 마라. 정부를 믿어 달라”는 최경환 국무총리 직무대행 겸 경제부총리의 발언은 닮아도 너무나 닮아있다.

 

메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권한과 권력에만 집착했다. 국민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메르스는 관심 밖 ‘뒷전’이었고, 국회법 개정안 통과에 대한 불만만을 표시하며 항의했다. 여당의 메르스 관련 당·정·청 회의 제안도 무시했다. 보다 못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일침 했다.

 

세월호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박근혜 번역기’ ‘아몰랑’ 등의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국민적 조롱거리가 됐다.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박 대통령은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그런데) 초기대응이 미흡했다”고 말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은 책임지는 자리지, 책임을 묻는 자리가 아니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관련 대책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사진=서울시)

지자체장 박원순을 시샘한 대통령 박근혜(?)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태도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지난 4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메르스 관련 긴급브리핑이 있은 후부터다. 그리고 3일이 지난 7일 정부는 ‘메르스 병원’ 24개 명단을 발표한다. 곳곳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절대반지인양 움켜쥐던 ‘비밀정보’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국가가 하지 못한 것을 박 시장이 한 셈이다.

 

박 시장의 결단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고, 메르스 대응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여기에 무능 정부에 대한 반사효과까지 따라왔다.

 

실제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주에 견줘 5.7%포인트 내려간 34.6%로 집계됐다. 2주 만에 10%포인트 이상 하락한 것이다. 반면, 박 시장의 지지율은 전주 대비 6.1%포인트 급등한 19.9%를 기록해 차기 대선주자 1위에 올라섰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박 시장은 지난달에 비해 6%포인트 가량 상승한 17%를 기록하면서 차기 정치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런 박 시장이 못마땅했을까? 무능하지만 시기심 강한 박근혜 정부는 ‘박원순 때리기’에 골몰했다. 박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를)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해결하려 할 경우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고 꼬집었고, 문형표 장관은 “정부조치가 마치 잘못된 것인 양 발표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박 시장을 의식한 듯 박 대통령은 지난 5일 국립중앙의료원을 전격 방문해 의료진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이 메르스 대응 현장을 직접 방문한 것은 지난달 20일 국내 첫 확진 환자가 나온 뒤 처음이다.

 

이런 가운데 검찰은 ‘메르스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박 시장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의료단체인 의료혁신투쟁위원회가 고소한데 따른 것이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인 최대집씨는 과거 ‘자유개척청년단’이란 보수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던 인물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적반하장”이라며 강하게 분개했다.

 

420년 전 선조의 ‘무능한 권력욕’은 전란 상황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의 열등감으로 ‘명장’ 이순신 장군은 3번 파직되고, 2번 백의종군했다. 임란을 승리로 이끈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 뒤 부정 축재자로 몰려 파직됐다.

 

역사는 돌고 돈다. 과거의 전란은 지금의 국가위기 또는 재난상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선조의 무능을 대신할 유능한 인재는 보이지 않는다. 백성을 염려한 이순신도, 국란을 슬퍼한 유성룡도 박근혜 정부에 없다는 것이 지금의 어려움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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