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김무성도 ‘박정희 벤치마킹’…美 간택은 ‘NO!’
용꿈 꾼 ‘무성대장’, 또 다시 미국 갈 이유 생겼다
  • 정찬대 기자
  • 15.07.3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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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지난 25일 미국으로 떠났다. 의제는 ‘안보’에 맞춰졌고, 타깃은 ‘한미동맹’으로 설정됐다. 7박10일 가운데 첫 일정은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주미 재향군인회 회원과의 만찬으로 시작됐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를 비롯한 방미 수행단은 논란이 된 ‘큰절 외교’를 선보였다.

 

김 대표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국립묘지에서도 큰절로 예를 표했다. 워커 장군 묘비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아이고 장군님”을 연발하는 등 ‘쇼잉(Showing)’도 보였다. 여기에 미국의 방산기업 록히드 마틴사(社) 관계자에게 “F-22 전투기를 얼마든지 사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과공비례(過恭非禮·공손함이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다)’라는 지적이 쇄도했다. 미국에 ‘눈도장’ 찍기 위해 집권여당 대표로서 ‘굽실 외교’를 폈다는 비판이다.

 

그는 또 “우리에겐 역시 중국보다 미국” “미국은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동맹”이라며 노골적인 친미 발언을 해 논란을 자처했다. 한중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김 대표는 2013년 1월 박근혜 당선인의 특사단 단장 자격으로 중국을 첫 방문한 바 있다. 그는 당시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중국 중 어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다”며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했다. 방중 때와 방미 때 발언이 각기 다른 셈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의원 일행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과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아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워커 장군의 묘비에 큰절을 올리고 있다.(사진=새누리당)

 

‘용꿈’ 꾼 김무성의 ‘반쪽짜리’ 방미일정

 

유력 대권주자들의 방미 역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우방인 미국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국내에선 ‘보수층 결집’과 ‘유능한 미래 지도자’란 인식을 심어줬고, 미국에선 ‘차기 유력 대권주자’임을 각인시켰다.

 

김 대표의 방미 일정은 대선을 2년여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권행보’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수행단 규모나 당초 계획된 일정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존 캐리 국무장관을 비롯해 조 바이든 부통령 등 행정부 최고위급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김 대표가 만난 주요 행정부 인사는 로버트 워크 국방부 부장관과 대니얼 러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정도가 전부다. 장관급 이상 회동은 모두 불발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05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미국을 방문할 당시 로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만난 바 있다. 2007년 2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도 회동했다. 김 대표와 여러모로 비교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반쪽짜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득보단 실이 많다는 의미다.

 

△미국을 방문 중인 김무성 대표가 지난 29일(현지시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한미 양국 미래에 관한 특별 강연을 하는 모습.(사진=새누리당)

‘안보’ 내세운 김무성, ‘박정희 벤치마킹’

 

박 대통령을 의식한 걸까? ‘안보’에 방점을 찍은 김 대표의 방미는 반세기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묘하게 닮아있다. 박 전 대통령의 방미 일정은 워싱턴DC와 뉴욕,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했다. 김 대표 역시 워싱턴과 뉴욕, 샌프란시스코를 차례로 방문했다. 아울러 김 대표가 찾은 알링턴 국립묘지는 존 F. 케네디가 잠든 곳이기도 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는 장면내각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른바 5·16군사쿠데타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묘수를 짜낸다. 바로 ‘미국의 간택’이다. 직접선거를 치르기엔 윤보선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좌익 이력을 지닌 그로선 어떻게든 미국의 ‘조서(詔書)’가 필요했다. 정통성과 대표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게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 의장은 당시 미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한 프레임에 담는데 성공한다. 인터넷 포털업체인 <네이버>에 ‘케네디’란 이름을 검색하면 두산백과에는 당시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이 메인에 걸려있다.

 

쿠데타 6개월 만에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회담을 성공시킴으로써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군사정부에 대해 ‘승인’ 받았음을 대내외에 알린다. 그리고 이는 엄청난 정치적 효과를 가져온다. 결국, 1963년 치러진 대선에서 46.6%를 얻은 박 전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45.1%)를 15만표 차이로 가까스로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79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미국을 방문 중인 김무성 대표가 지난 28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회의사당 레이번 하원의원회관에서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과 만나 환담을 나눴다.(사진=새누리당)

“워싱턴 와서 1등 하려해선 안 돼”

 

김 대표는 워싱턴의 한 강연회에서 북핵문제와 관련해 “전략적 인내를 뛰어넘는 창의적 해법”을 강조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그는 ‘구체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하고 싶은 얘기는 있지만 대통령이 계시니 여기까지만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는 또 “워싱턴에 와서 1등 하려고 하면 안 된다. 2등으로 만족해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을 의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에 범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앞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 거취 문제와 관련해 당 안팎에선 김 대표가 지나치게 청와대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일각에선 ‘용꿈’을 꾸기 위해 박 대통령과 친박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기도 했다.

 

김 대표는 방미 중 대권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 “나 스스로 대권주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권은 그 시점에 국민의 소망에 맞는 사람이어야 가능한데, 나한테 그런 기회가 오겠느냐”고도 했다.

 

김 대표는 보수정권 재창출을 강조하며 “내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그 다음 문제”라고 밝혔다. 이는 결국, ‘기회’가 주어지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언제든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의미다.

 

당 대표 취임 후 첫 방미일정은 ‘미완’에 그쳤다. 결국, ‘친미 보수’를 내세운 김 대표가 대선을 앞두고 또 다시 미국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미국의 간택을 원하는 김무성 대표, 여권 내 차기주자 1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미국의 조서’를 받지 못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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