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근혜와 부시, 그리고 박정희와 ‘아버지 부시’
한·미 ‘父女-父子’ 대통령…정보 장악 통한 ‘권력의 대물림’
  • 정찬대 기자
  • 15.09.1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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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접견, 환담을 나눴다. 사진은 이날 접견에서 부시 전 대통령이 자신의 회고록 ‘결정의 순간’을 박 대통령에게 선물하는 모습.(사진=청와대)

 

박근혜 대통령 발언에 대한 조롱을 담은 ‘박근혜 번역기’가 한동안 회자된 적 있다. 청와대 국무회의나 공식 석상에서 내뱉는 말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 붙여진 별칭이다. ‘아몰랑’(아, 몰라)을 비롯해 대선 슬로건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패러디한 ‘내 말을 알아듣는 나라’까지 등장했다.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이나 논지에서 벗어난 엉뚱 화법, 그리고 소통 부재가 만들어낸 씁쓸한 캐릭터다.

 

그런데 박 대통령 버금가는 “언어장애”(?)가 우방인 미국에도 있었다.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절친’이자, 미국 제43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워커 부시(George W. Bush)다. 그의 어록은 ‘아몰랑’과 비슷하게 ‘부시즘(Bushism)’이라며 희화화됐다.

 

취임 후 그가 내놓은 말실수를 모아 책으로 엮은 <부시의 언어장애>라는 책도 나왔다. 저자 마크 리스핀은 책을 통해 부시 전 대통령의 자질과 성격은 물론 정치적 과오와 잦은 말실수가 언론에 의해 어떻게 왜곡, 과장됐는지 분석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에 의해 걸러진 부시의 모습과 정치가들의 잘못된 편견 또한 질책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 정부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일각에선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향해 ‘직무유기’라는 비판도 나온다.

 

경제는 ‘바닥’, 안보는 ‘위기’, 재난은 ‘무덤덤’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은 닮은 구석이 많다. 두 사람 모두 경제를 망쳐놨다는 세간의 질타를 받고 있다. 여기에 보수당(새누리당-공화당) 출신답게 ‘안보위기’를 최대한 활용했다.

 

부시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고, 박근혜 정부는 경제 불황의 터널 속에 갇혀 있다. 이 때문에 부시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가 다음 정권에 넘겨줄 것이라곤 ‘빚’밖에 없다는 조롱까지 들린다.

 

보수정권의 숙명이 그러하듯 두 사람에게 ‘안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절대반지’다. 박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모두 ‘안보제일’을 외쳤지만, 긴장을 위기로 키우면서 ‘안보무능’을 드러냈다.

 

1990년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에 이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석유전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대량살상 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또 2001년부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됐다. 지난해 12월 오바마 현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우리가 그러했듯 난민들의 고통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박 대통령 역시 대북강경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적 긴장 고조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양측 모두에게 정치적 효과를 안겨주고 있다. 결국, 보수정권과 북한이 정치적 상호협력의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적대적 공생관계인 셈이다.

 

두 사람은 국가재난 사태에 대한 대처 능력에서도 비슷한 점을 보인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박근혜 정부와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 일대를 강타한 카트리나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처 능력은 무능의 결정판으로 손꼽힌다.

 

9·11과 세월호, 그리고 빈 라덴과 유병언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을 보면 9·11사태 소식을 접한 부시 대통령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유치원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사고 후 7시간이 오리무중이다. 국가적 재난에 놀라우리만큼 침착한 두 사람에 대해 무덤덤 또는 무감각이란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빈 라덴과 유병언은 각각 9·11과 세월호사건 이후 ‘악의 원흉’으로 지목됐고, 모든 화살은 그들에게 돌아갔다. 미국은 빈 라덴을 잡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우리 정부는 유병언 전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파헤쳤다.

 

재밌는 사실은 부시 가(家)와 빈 라덴 가문은 오랫동안 사업파트너 관계였다는 점이다. 더욱이 ‘아버지 부시’와 빈 라덴은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화씨 911>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9·11사태 이후 수일 동안 일체의 비행기 운행이 중단된 상황에서 몇 대의 비행기가 출국했고, 그 안에 빈 라덴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운행 허가는 백악관에서 직접 내렸다는 폭로도 곁들였다.

 

세월호 참사 34일 만에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박 대통령은 눈물을 훔친 뒤 서둘러 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한다. 원자로 설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공교롭게도 이 원전의 폐기물업체로 선정된 업체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의 관계사인 ‘(주)아해’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또 한 번 파문이 일었다.

 

유 전 회장은 수년간 정치권과 줄을 대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반영하듯 ‘(주)아해’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매출액이 57%(288억원) 늘어나는 등 회사규모가 커졌으며, 2009년부터 매년 국고보조금을 수억 원씩 받아왔다.

 

부정선거 의혹, 임기 내내 발목 잡다

 

“투표하는 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개표하는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소련의 정치인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의 말이다. 박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줄곧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을 받아왔다. 부시 전 대통령 역시 일부 진영으로부터 ‘대통령직을 도둑맞았다’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2000년 당시 민주당 앨 고어와 격돌한 부시는 유권자 직접투표에서 50만표(0.5%) 이상 뒤졌으나 선거인단 확보에서 277 대 266으로 앞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플로리다 선거인단의 향방에 따른 결정이었다.

 

‘무효표’가 많이 나온 플로리다에서는 당초 재검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중간 집계에서 엘 고어가 더 많은 표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이 재검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이를 중단시켰다.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부시의 친동생 젭 부시(Jeb Bush)였다.

 

2004년 재선 당시에도 같은 의혹이 제기된다. 이번에는 미 대선의 캐스팅보드 역할을 해온 오하이오 주에서다. 전자 투·개표기 오류(개표과정 컴퓨터 조작의혹)에 미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한 프로그래머는 법정에서 “공화당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투표 시스템에 조작코드를 넣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개표결과가 51 대 49가 나오도록 설계했다는 의미다. 미 의회에서는 일부 의원을 중심으로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까지 언급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8대 대선 당시 개표기 오류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박근혜표’로 분류된 묶음에서 ‘문재인표’가 대량으로 발견된 것이다. 여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버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됐다. 하지만 여러 의심에도 불구하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외치(外治)에 전념한 권력, 그리고 ‘아버지의 사람’

 

악화된 내치(內治) 상황에 대한 돌파구였을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 두 대통령은 임기 초반부터 상당부분 ‘외치(外治)’에 공을 들였다.

 

박 대통령은 정권 초 한·미 간 공동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양국의 동맹관계를 곤고히 했고,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 공조와 대중 경제협력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 개성공단 정상화, 이산가족 상봉 행사 등을 통해 대북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이외에 세일즈외교를 통한 해외사업 수주 또한 괄목할 만하다. 국내 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적극적인 대외 정치적 공세를 통해 국가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진 것이다. 물론 해외순방 이후에는 어김없이 지지율이 상향 조정됐다.

 

부시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자인 그는 2001년 요르단을 시작으로 2004년 호주와 칠레, 싱가폴, 2005년에는 중남미 6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2006년에는 모로코와 바레인, 오만, 2007년에는 페루와도 협정을 맺었다. 다만, 한미 FTA 체결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국내 분위기 탓에 임기 후 이뤄졌다. 한쪽에선 전쟁을, 또 다른 한쪽에선 협정을 맺음으로써 국제 정세를 핸들링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사람’을 중시 여겼다. 현 정부 막후 실세 역할을 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도운 유신헌법의 입안자 중 한명이다. 또 박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 ‘7인회’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인 강창희 의원은 19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고, 현경대 전 의원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중용됐다. ‘7인회’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유신헌법을 기초했으며, 박 전 대통령 입장을 대변한 언론계 주요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 강창희 전 의장은 군(軍)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이기도 하다.

 

부시 전 대통령도 아버지 때 사람을 중용했다. 부시 행정부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은 ‘아버지 부시’ 집권 당시 국방장관을 역임한 최측근 실세였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아버지 때 합동참모의장으로 발탁돼 걸프전을 이끌었으며, 파월 국무장관 후임으로 내정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역시 ‘아버지 부시’ 행정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아버지의 사람’이다.

 

부녀(父女) 대통령, 부자(父子) 대통령

 

두 사람의 가장 큰 공통점은 부녀(父女) 대통령, 부자(父子)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 부친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일명 ‘아버지 부시’로 불리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 W. Bush) 역시 제41대(1989.01~1993.01) 미 대통령을 지냈다.

 

재밌는 점은 두 사람 모두 군인 출신이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관동군(일본군)에 배속돼 일본이 패망하던 때까지 중위로 근무했다. ‘아버지 부시’ 또한 해군장교로 임관해 폭격기 조종사(중위)로 태평양 인근에 배치돼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몸소 체험한 박정희와 ‘아버지 부시’는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보를 쥔 자가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장교 출신이기도 한 박 전 대통령은 국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설립해 정권유지의 선봉대로 활용했다. ‘아버지 부시’ 역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출신의 정보통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아들 부시’)이 행정부 수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대(代)에 쌓아둔 정보 장악의 결과물이란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리고 정보 장악의 체화는 박 대통령과 ‘아들 부시’에서도 자연스레 이어졌다.

 

‘Oh my God’, 그리고 ‘Les Miserables’의 열풍

 

2004년 부시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던 날, 영국 가디언지의 1면은 시커먼 배경에 아무것도 없이 ‘Oh my God’이란 세 단어로 부시 재선에 대한 심경을 표현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당선된 지난 2012년 12월19일, 때마침 영화 <레미제라블>이 개봉됐고, 많은 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당시 상황과 동일시했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the song of angry men. It is music of a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에 찬 사람들의 외침이.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다짐이!)

 

<레미제라블>의 삽입곡 ‘민중의 노래’를 열창하던 사람들은 ‘서울의 봄’을 5년 후로 연기하며 ‘멘붕’을 스스로 위로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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