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럼 통진당은 왜 해산한 거지?”
‘내란인 듯 내란 아닌’…이상한 이석기 판결
  • 정찬대 기자
  • 15.01.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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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는 사건 제보자의 추측에 불과하다. RO가 존재하고 회합 참석자들이 RO의 구성원이란 점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 (2015년 1월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이석기 등 피고인들이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등 폭력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했고, 이는 이석기 등 내란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지하혁명조직)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구체적 위험성에 대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엇갈린 판단을 내렸다. RO의 실체 여부를 두고 최고 사법기관이 이렇듯 다른 판결을 내리면서 국민적 비판의 화살은 사실상 RO세력의 실체를 인정, 이를 정당해산의 결정적 근거로 삼은 헌재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섣부른 판단을 내리면서 이 같은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과 함께 일각에선 헌재 판결을 두고 ‘정치적 판결’이란 비아냥도 쏟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실체도 없는 조직’을 근거로 헌정사상 최초로 정당해산을 결정한 헌재의 판단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엉터리 헌재 판결”…왜 나왔나

 

RO의 실체 여부는 이석기 전 의원 사건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헌재는 이를 근거로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국민이 뽑은 소속 국회의원을 면직·박탈시켰다. 그리고 대법원의 판단은 이 같은 헌재 판결에 사실상 제동을 건 것과 마찬가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이상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헌재의 통진당 해산결정과 관련 “엉터리 판결을 했으니 부끄러울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헌재는 교묘하게도 지하혁명조직인 RO를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전 의원 등이 ‘내란 관련 회합’을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논란이 확산되자 보수진영은 그제야 RO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헌재를 두둔했다. 결과적으로 헌재는 이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셈이 됐다.


헌재는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서둘러 정당해산 심판을 내렸다. 이 때문에 헌재가 대법원에서 RO의 실체가 부정될 것이란 판단을 이미 내렸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앞서 항소심에서 RO의 실체는 부정됐고,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 또한 인정되지 않았다.


통진당 소송대리인단 이재화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이와 다른 결론을 내리기 어렵게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대법 판결이 나오기 전에 헌재가 선수쳐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재가 대법원 판결과 다른 사실관계를 인정해 해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이 형사재판, 헌재가 민사재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판결이 다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말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형사재판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거능력의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반면, 민사재판의 경우 사실 인정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당초 민사절차를 적용한 헌재의 정당해산 심판이 ‘정치적 판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판단으로 정당해산을 결정한 헌재 판결에 면제부가 될 수는 없다. 통진당 해산 심판의 근거 자체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이에 근거한 헌재 판단은 애당초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중대·명백한 하자가 발생한 셈이다. 그리고 이는 대법원 판결로 명확해졌다.


헌재는 또 신창현 전 통진당 인천시당 위원장과 윤원석 <민중의소리> 대표 등이 ‘내란 관련 회합’에 참석한 사실이 없는데도, 이들이 회합에 참석했다고 정당해산 결정문에 기재하는 오류를 범했다. 신씨와 윤씨는 26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그로부터 3일 뒤인 29일 헌재는 관련 내용을 직권으로 삭제했다.


헌재 결정문의 오류는 이 뿐만이 아니다. 단체명이 틀리거나 직함을 잘못 기재하는가 하면, 이석기 전 의원 1심 판결일 2014년 2월17일을 2017년으로 잘못 적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오류를 범한 곳이 모두 9군데다.


헌재가 결정문을 수정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결국, 헌재가 사상 초유의 위헌정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기초적인 사실조차 틀린 ‘짜깁기 결정문’을 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앞 뒤 안 맞는 대법원 판결

 

대법원 판결 역시 석연찮은 것은 매한가지다. 일단 진보진영에서는 이 전 의원 내란음모 혐의가 무죄로 판명된 것에 대해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RO의 실체가 없다”면서도 그의 내란선동이 유죄로 판결된 것에 많은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대법원은 RO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전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도 무죄로 판결했다. 그럼에도 그의 내란선동은 유죄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아 보인다.


대법원은 “내란음모죄가 성립하려면 폭동의 대상과 목표에 대한 합의와 실질적 위험성이 인정돼야 한다”며 “피고인들이 내란을 사전 모의하거나 준비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다만, “회합에서 피고인(이석기)은 주요 국가기간시설 파괴와 선전전, 정보전 등 실행 행위를 목적으로 발언했다”며 이를 국헌 문란으로 간주, 내란선동죄를 적용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의 ‘내란모의’ 법리해석은 몇 사람이 모여 ‘술안주로’ 국가전복을 얘기할 경우 이 역시 ‘내란선동’에 해당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 된다.


실제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대법원의 ‘내란선동’ 법리에 대해 “과거 유신시절에 적용됐던 ‘내란선동죄’의 판단에서 전혀 발전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대법원이 내란선동죄를 단지 표현단계에서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면서도, 내란음모를 무죄로 선고하면서 내란선동죄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법원 판결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이런 이유로 이인복·이상훈·김신 등 대법관 3명은 소수의견을 통해 내란선동이 유죄가 되기 위해선 실질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석기 사건’에서는 이를 단정하기 어렵다며 이 전 의원에 대해 내란음모와 선동 혐의 모두 ‘무죄’라 판단했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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