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朴대통령의 말바꾸기…‘그때와 지금은 달라’
野 시절 ‘국회법개정안’ 추진…새누리 ‘국회선진화법’ 맹공
  • 정찬대 기자
  • 15.06.0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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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는 ‘신의(信義)’가 있어야 한다. 그만큼 정치인이 하는 말의 무게도 무겁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잦은 말 바꾸기와 입장번복을 우린 너무 쉽게 본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들의 말과 행동, 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일관성 없는 태도에 많은 이들은 ‘정치적 환멸’까지 느낀다.

 

최근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국회 간 신경전이 상당하다. 새누리당은 법안을 진두지휘한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책임론까지 불거졌다. 그런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다.

 

유 원내대표가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와 협상할 당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모든 추인을 받았고,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지지를 받았던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새누리당, 정확히 말하면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의 태도는 박근혜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확연히 달라졌다.

 

“유승민 원내대표 취임 후 당·청 갈등이 심화됐다. 참다, 참다가 말씀 드린다”(6월1일 김태호 최고위원), “유 원내대표가 사퇴를 포함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6월2일 김태흠 의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유 원대대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6월2일 이장우 의원) 등 맹공을 퍼부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1일 오전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국회법 개정안이 발효되면) 국정은 결과적으로 마비 상태가 되고 정부는 무기력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사실상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발끈’과 새누리당 의원들의 ‘돌변’, 이를 두고 한 정치평론가는 “(청와대로부터) 오더를 받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1일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사진=청와대 홈페이지)

 

朴대통령, ‘더 강력한 국회법개정안’ 발의

야당 된 새누리 두 차례 ‘국회법개정’ 시도

 

1998년 12월, 박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 시절 현 국회법 개정안보다 훨씬 더 강제력 있는 국회법 개정안 발의에 동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으로 불린 박 대통령이 ‘그때그때 달라요’ 태도를 보인 게 드러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현 창원시장)이 대표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한나라당 동료 의원 33명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 개정안 내용을 보면 “행정부는 국회 의견을 따라야 한다”며 강제규정을 뒀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수정·변경 등 요구받은 사항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하여야 한다”는 내용보다 좀 더 명확한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행정부에 위임한 행정입법이 많아지고, 국민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크기 때문에 국회가 법률의 입법정신에 따라 행정입법에 대한 통제를 강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개정안 제안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행정부 수장이 된 지금의 박 대통령은 ‘정부입법의 마비와 무기력’을 이유로 국회법 개정안에 반대했다. ‘신뢰의 정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청와대는 “발의가 아닌 서명이었다”고 즉각 해명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4일 오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안상수 전 의원이 사인해달라고 하니 안 해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1998년 국회에 들어갔던 점을 감안하면 (공동발의 참여는) 자명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신념이나 철학 없이 동료 의원의 요청에 그냥 사인해줬다는 의미다.

 

한나라당은 또 지난 17대 국회인 2005년에도 국회법 개정을 시도했다. 심재철 의원을 비롯해 현 새누리당 의원들은 상임위에서 대통령령이 법률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 내용을 ‘통보할 수 있다’고 한 국회법 규정을 ‘통보해야 한다’고 개정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공교롭게도 한나라당이 국회법 개정을 시도한 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이었다. 1998년은 ‘국민의 정부’ 출범 첫해였고, 2005년 한 해는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발언 등으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야당이 된 한나라당이 행정부 통제와 대통령 권한 축소를 위해 국회법 개정을 들고 나왔다는 세간의 비판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국회선진화법 개정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사진=새누리당 홈페이지)

 

새누리, 또 “국회선진화법 개정하자”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달라’

 

최근 새누리당의 국회선진화법 공격이 더욱더 노골화되고 있다. 6월 임시국회와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선진화법 개정을 다시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달 29일 본회의 직후 “국회선진화법이 현행대로 유지된다면 우리나라 미래에 큰 불행과 장애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서청원 최고위원은 전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회 안건이 야당 동의 없이 한건도 처리되지 못하는 국회가 해괴하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서도 선진화법 개정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권은희 대변인은 4일 국회 브리핑을 통해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선진화법 개정에 국민을 대신해 앞장 서겠다”고 했으며, 박대출 대변인은 “선진화법은 ‘야당독재’, ‘소수독재’를 만드는 법으로 변질됐다”며 개정 필요성을 언급했다.

 

새누리당은 지난해 9월 정기국회 당시에도 선진화법의 위헌 여부 등을 검토하기 위한 ‘국회법 정상화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 법리 검토까지 착수하는 등 법안 개정에 팔을 걷어붙인 바 있다. 그리고 2014년 정기국회가 끝나고 2015년 6월 국회가 찾아왔다.

 

선진화법은 새누리당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발의된 법안이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관위에 대한 디도스 공격과 한나라당 돈봉투 전당대회 사건 등이 겹치면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고, 19대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우려한 목소리도 당내 곳곳에서 들렸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총선 공약으로 국회선진화법을 내세웠고, 여당 원내대표였던 황우여 사회부총리가 총대를 멨다. 그리고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과반석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총선 승리 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당내 분위기는 달라졌다. 법안 반대의견이 터져 나왔고, 이 때문에 법안 통과가 지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새누리당이 정권연장에 성공하면서 선진화법 개정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선진화법 추진을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논란이 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박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국회법 개정안이 ‘제2의 국회선진화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는 청와대 한 관계자의 말은 선진화법에 대한 청와대(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을 그대로 말해준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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