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in] 일본인 노학자도 위안부 한일협정에 분개했다
사토 쇼진 “한국 정부의 우경화, ‘친일파’ 박정희가 뿌리”
  • 정찬대 기자
  • 16.03.0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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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충남 홍성 민간 유해발굴 현장에서 유가족들의 동영상을 찍고 있는 일본 역사학자 사토 쇼진 씨(우)와 재일동포 김정미 씨(좌)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회담을 보면서 아주아주 분했다. 아베는 사죄하지 않았고, 일본은 알량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굉장히 절망스럽고 화가 났다”

 

일본인 역사학자 사토 쇼진(佐藤 正人·73세) 씨는 2일 <커버리지>와 인터뷰에서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자화상을 지난해 12월 합의된 ‘최종적, 불가역적’ 한일회담에 빗대 설명했다.

 

또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서도 “일본이 한국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재식민지화하는 조약이었다”고 평가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 스스로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였고, 민중을 학살한 위치에 있던 ‘친일파’였기 때문에 그런 회담이 가능하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우경화된 것도 그 뿌리는 친일파인 박정희에 있다”고 주장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이 빼앗긴 상태에서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개칭하고 일본 영토로 강제 편입시켰다”며 “이는 매우 명확하고 간단한 사안”이라고 전했다. 그는 대학시절 고서점에서 구입한 독도 관련 고지도(古地圖)를 한국 정부출연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에 기증하기도 했다.(관련기사: [단독] 독도연구소, 日 사학자 기증 ‘독도 고지도’ 2년째 방치)

 

사토 씨는 아베 신조 (安倍 晋三) 일본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법안에 대해 “다른 나라를 경제·군사적으로 또 다시 지배하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며 “자위권 부활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전쟁법’으로 매우 우려스런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현재 ‘해남도(海南島) 근현대사 연구회’ 회장과 ‘일제강점기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에서 활동 중인 그는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내뱉었다. 아울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문제 역시 일본 식민지배로 인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토 씨는 “기슈광산을 경영한 이시하라(石原) 산업은 군과 연계해 중국 하이난섬(해남도·海南島)과 필리핀 등지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며 “지금도 해남도 조선촌(朝鮮村)에는 일제강점기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매장돼 있다”고 밝혔다.

 

실제 하이난섬에는 2천여 명의 조선인이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가운데 천여 명이 1945년 패전한 일본군의 조선촌 기습으로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른바 ‘천인갱(千人坑) 사건’이다.

 

사토 씨는 기슈광산(미에현 구마노시) 인근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에 이를 기증하고자 했지만, 우리 정부의 무관심에 관련 사업은 사실상 무산됐다. 사토 씨는 “우리가 관리하겠다고 했는데도, 결국은 그렇게 됐다”며 “현재는 기증이 보류된 상태”라고 허탈감을 표시했다.

 

앞서 2014년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측으로부터 기부를 제의받은 경상북도는 내부 논의 끝에 해당 추모사업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정부에서 추진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 이를 행정자치부와 기획재정부, 외교부 등에 건의했으나 제대로 된 이행답변을 듣지 못했다.

 

사토 씨는 ‘감사하다’는 말을 싫어한다. 오히려 “일본이 죄송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취재진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고희(古稀)를 넘긴 그에게 한일 과거사 문제는 광복 70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과 싸워야할 미해결 과제다. 사토 씨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한편, 사토 씨와의 만남은 2월 말(27일~29일) 충남 홍성 민간 유해발굴(한국전쟁기 보도연맹과 부역혐의자 총살사건) 현장과 지난 2일 늦은 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이뤄졌다. 인터뷰는 사토 씨와 함께 활동 중인 재일동포 김정미(66) 씨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사토 쇼진 일본 역사학자와의 인터뷰 전문>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인터뷰가 끝난 뒤 웃고 있는 사토 쇼진 씨의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제]

“소녀상 자리, 日 식민지배 기억하는 소중한 장소”

“수요집회 참석한 젊은층 보며 감동했다”

 

커버리지: 오늘(3월2일) 수요집회에 참석했다. 일본인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조금은 낯설게도 느껴지는데.

사토 쇼진: 수요집회는 마땅히 일본인이 일본에서 해야 할 일인데, 한국에서 해준 것에 오히려 감사드린다. 제가 힘이 없어 그저 집회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화가 나고 또한 죄송스럽다.

 

커버리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평소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나?

사토 쇼진: 제국주의 국가에서 식민지 국가에 대한 강탈이나 학살 등이 많이 이뤄졌는데, 위안부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위안부 여성의 인권을 말살한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커버리지: 수요집회에 참석해보니 어떻든가?

사토 쇼진: 수요집회에 나간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수요일을 맞게 되면 꼭 참석하려고 했다. 또 중국 하이난섬(해남도·海南島)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분들과도 함께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2005년 고(故) 김경태(44)씨 분신 사건 때는 현장에서 이를 목격했다. 당시 경찰이 달려와 발로 불을 끄던 장면이 지금도 생각난다.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의 식민지 참략지배를 기억하는 소중한 장소가 되고 있다. 일 년 만인 오늘 ‘평화의 소녀상’을 다시 찾았는데, 역시나 그런 자리라고 재인식했다.

 

커버리지: 수요집회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사토 쇼진: 수요집회가 1000회(2011년 11월14일)를 맞이했을 때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당시 저도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상당수 참여한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일본 시민사회운동과 큰 차이점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는 주로 나이든 사람들이 그런 활동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여러 연령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시민사회운동의 확장성을 느꼈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일본 역사학자 사토 쇼진 씨. ⓒ커버리지(정찬대)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그리고 친일 우경화]

“한일회담, 아주아주 분했다…아베 사죄도 없었다”

“우경화 뿌리는 ‘친일파’ 박정희…한일협정은 재식민지화 조약”

 

커버리지: 지난해 12월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사토 쇼진: 한일회담을 보면서 아주아주 분했다. 아베는 사죄도 안했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금전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10억엔(약 100억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많이 분했다. 특히, 회담 결과를 놓고 일본 정부에서 아주 잘했다며 기뻐했는데, 이것을 보면서 더더욱 화가 났다. 그러한 졸속 회담을 한 한국 정부 역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커버리지: 아베 정부 출범 이후 갈수록 우경화되는 일본 사회에 대한 우려가 많다.

사토 쇼진: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좋은 사회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일본의 발전을 두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출발했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은 식민지 시대에 수탈한 것을 한국에 돌려주지 않았고, 또한 패전 후 일본의 경제성장은 한국전쟁의 특수로 이뤄졌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경제성장의 역사를 전제로 아베 정권이 나왔다. 일본 헌법은 1945년 8·15 이후 전환기에도 그대로 유지됐고, 경제 발전도 8·15 이전과 이후 계속됐다. 결과적으로 지속된 전시체제가 일본의 경제성장을 가져온 셈이다.

 

커버리지: 한국사회 역시 우경화되고 있다. 그리고 국정교과서 등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도 적지 않다.

사토 쇼진: 한국 정부의 우경화도, 일본 정부의 우경화도 이를 지지하고 선택한 국민에게 책임이 있다. 부패한 보수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다. 한국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 즉 친일청산 문제를 해소하지 않은 채 지나온 것이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그대로 남아있다. 결국 이것이 한국 정부가 우경화되는 뿌리가 됐다. 결론적으로 보면 한국 정부의 우경화는 박정희 정권의 친일과도 관계돼 있는 셈이다.

 

커버리지: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이뤄진 한일협정(1965년 6월22일)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토 쇼진: 한일협정 당시 대학생이었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도 많이 했다. 일본 국회에서 데모하고 시위하면서 도로에 드러눕기도 했다. 당시 학생으로서 이에 반대한 첫 번째 구호가 ‘일본이 한국을 재식민지화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한일협정은 일본이 한국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재식민지화하는 조약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러한 협정을 체결한 것은 박 전 대통령 스스로 일제강점기 때 만주군 장교였고, 민중을 학살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친일파였기 때문에 그런 회담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일본 역사학자 사토 쇼진 씨. ⓒ커버리지(정찬대)

[독도문제 관련]

“독도는 한국영토…너무나 명확하고 간단”

“1905년 독도가 다케시마로 바뀌었다”

 

커버리지: 독도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사토 쇼진: 독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보고한 바 있지만,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란 사실이 분명하다. 또한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실질을 들여다보면 아주 명확하고 간단하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커버리지: 독도 문제와 관련해 과거 식민지 정책의 문제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토 쇼진: 1905년 2월 일본은 독도를 돌연 다케시마로 개칭하고 일본 땅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은 그 당시 이미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었다. 1877년 일본 정부의 공식문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그런데 1905년 한국이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독도의 명칭이 다케시마로 바뀌었고, 일본 영토로 발표된 것이다. 그래서 독도 분쟁이 식민지 정책의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커버리지: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기록된 고지도(古地圖)를 기증한 바 있다.

사토 쇼진: 40여 년 전 대학시절 역사학도(歷史學徒)로서 연표와 지도가 기본적인 사료(史料)라고 생각했는데, 고서점에서 관련 지도를 우연찮게 발견하고 구입하게 됐다. 가난한 고학생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고서(古書)가 그다지 비싸지 않아서 구입할 수 있었다. 일본도 당시에는 학생운동이 매우 치열하던 때다. 그래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역사가 사회의 근본이란 생각에 자연스레 역사를 전공하게 됐다. 지도를 구입할 당시만 해도 독도문제를 지금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할 중요한 지도라는 것을 알았고, 이후 해당 지도가 한국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일본인인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는 한국의 정부기관에서 보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2014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에 지도를 기증하게 되었다.

 

커버리지: 역사를 전공하면서도 유독 한일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인가.

사토 쇼진: 대학시절 젊고 열정이 많아서 세계사를 다 볼 수 있는 그런 이론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알게 됐고, 그 중요성을 재인식하면서 관련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일본 역사학자 사토 쇼진 씨. ⓒ커버리지(정찬대)

[동북아 정세와 日 집단자위권 부활]

“아베, ‘전쟁법’ 통해 제국주의 침략 드러내”

“日, 전쟁법 부활 후 美와 대립도 가능”

 

커버리지: 일본은 현재 집단적 자위권 부활을 골자로 한 법안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토 쇼진: 우리는 그것을 ‘전쟁법’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그런 법이다. 매우 우려스런 상황이다.

 

커버리지: 일본의 자위권 부활을 미국이 적극 돕고 있다는 지적도 많은데.

사토 쇼진: 그렇다. 일본 정부가 미국의 힘을 빌려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대로 협력하고 협조하면서 다시 전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아베가 추진하는 ‘전쟁법’의 골자다. 방법은 다르지만 일본은 지금까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에 군대를 보내왔다. 자위대라면서도 계속해서 해외 파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커버리지: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위권을 부활하려 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사토 쇼진: 일본 내에서도 일본을 미국의 종속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미국의 요구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본 정부가 원해서 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다른 나라를 경제·군사적으로 또 다시 지배하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전쟁법 부활 후 동북아 패권의 다툼 속에서 일본이 미국의 종속이 아닌 미국과의 대립이나 갈등도 가능하다고 보여 진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기슈광산 추모터 기증, 한국 정부가 거부했다”

“한국전쟁 양민학살, 日 식민지배 연장선상에서 발생”

 

커버리지: 현재 ‘기슈(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사토 쇼진: 조선인과 중국인을 연행해 학살한 현장은 일본에서도 200~300개 이상이 될 정도로 많다. 나는 홋카이도(북해도·北海道)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도 그런 현장이 많이 남아있다. 북해도 오타루(사토의 고향) 근방에도 기슈와 같은 광산이 있는데, 과거 ‘기모도쵸 조선인 학살사건’(구마노시 기모도쵸에서 발생한 조선인 강제징용자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연구를 하면서 자연스레 기슈광산에 대한 조사도 하게 됐다.

 

커버리지: 지난달 말 충남 홍성 유해발굴(한국전쟁기 보도연맹 및 부역자처벌 사건) 현장도 찾았다. 어떤 이유에서 민간 유해발굴 현장을 찾게 됐나?

사토 쇼진: 한국전쟁 당시 이뤄진 양민학살은 일본 식민지배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충남 홍성에서의 보도연맹원 학살도 한국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군사경계선이 있었기 때문에 발발했고, 군사경계선은 분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분단은 식민지배 이후 생겨났다. 누가 식민지를 만들었는가, 바로 일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홍성에서 발생한 근현대사의 아픔은 일본 식민통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 사람으로서 이를 알아야 한다고 보고 관련 현장을 찾게 됐다.

 

△지난달 27일 충남 홍성 민간 유해발굴 현장에서 동영상을 찍고 있는 일본 역사학자 사토 쇼진 씨의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커버리지: 하이난섬(해남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은데.

사토 쇼진: 기슈광산을 경영한 이시하라(石原) 산업이 군과 연계해 해남도와 필리핀 등지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 1998년 여름 해남도를 답사하던 중 조선촌(朝鮮村)이란 지명을 발견하고, 관련 조사를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왔다. 이시하라 산업이 경영하던 해남도 광산은 수많은 강제징용자들이 학살된 곳이며, 지금도 조선촌에 암매장된 유골들이 많이 남아있다.

 

커버리지: 기슈광산과 관련한 추모 부지를 한국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토 쇼진: 2008년 구마노시와 이시하라 산업에 추모비 건립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후 모금을 통해 부지를 직접 사들여 2010년 3월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 그런데 미에현과 구마노시가 추모터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고, 현재 해당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 상태다. 분명 자기들한테 책임이 있는 사건을 두고 부지(땅)도 제공 않고, 비석도 안 세우며, 여기에 세금까지 부과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지자체가 과세한 세금을 내는 것이 식민지배의 학살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끝까지 거부할 생각이다. 기슈광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강원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도, 경상북도 순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들 중 유가족 두 명이 현재 경상북도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이후 경상북도에서 추모터를 받아주면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해 해당 지지체에 이를 기증하려 한 것이다.

 

커버리지: 그런데 기부가 보류됐다. 한국이 사실상 이를 거부한 것인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사토 쇼진: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있으니깐 (한국)지자체에서 이를 받아들이기가 거북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받지 않겠다는 것을 억지로 받으라고 할 수도 없으니 우리도 난감하다. 더욱이 기증만 받으면 관리는 우리 쪽에서 하겠다고 했는데도, 사실상 보류 상태에 놓여있다. 지금이라도 수용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기증하겠는데…. 한국 측에서 그렇게 나오니 달리 방법이 없다. 일단은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커버리지: 마지막으로 한일 양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사토 쇼진: 일본이 먼저 역사적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조선인 피해자들의 명단이나 관련 사실도 부정하고 있는데,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이를 밝혀내야만 한다. 그리고 관련 행위에 대한 사죄가 있어야 한다.

 

과거 일본이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선 친일파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친일파가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화할 수 있었고, 식민지 경영도 가능했다. 물론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 친일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도 분명 존재했다. 이를 테면 부모가 친일파였다든가, 실제 이에 대한 증언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라도 자기반성이 있어야 했다. 한국은 해방 후 친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지나왔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과거 친일파로 활동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쥐었던 이들이 여전히 이를 계승하고 있는 현실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커버리지 정찬대 기자(press@coverage.kr)

 

 

* 관련기사 바로가기 : [단독] 독도연구소, 日 사학자 기증 ‘독도 고지도’ 2년째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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